운명은 순간인거야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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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18>
  • 한지윤
  • 승인 2018.03.2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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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육신을 말하는 건가요?”
한 박사는 좀 비꼬는 듯 말했다.
“처음은 선생께서 관여하는 것은 육신의 문제뿐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자세히 음미해 보면 정신적인 부분도 상당히 많은 것 같군요.”
“글쎄요.”
한 박사는 글라스의 술잔에 입술을 적셨다.

“그런 말을 하시니까 생각이 나는데, 병원을 개업한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일이었죠. 하루는 경찰서에서 호출이 왔어요. 이 근방은 서울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해서 좀 개화된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게 많았습니다. 그 때가 아마 밤 9시쯤 되었을 걸요. 한 잔하고 얼큰해 있을 때였습니다. 비가 오는데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순경의 뒤를 따라서 나섰지요. 한 30분가량 걸었나 어두컴컴한 후미진 집 구석방에 갓난애가 죽어 있었어요. 산모는 스무 살도 못 되어 보이는 애숭이 였지만 울지도 않고 한 쪽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순경이, ‘선생님 사인은 뭐지요?‘라고 내게 물어요. ‘글쎄 뭘까?’ 라고는 말했으나 실은 알아채고 있었지요. 갓난애의 목에 목이 졸린 흔적이 있었거든요. ‘선생님, 병사입니까?’ 라고 또 물어 와요. 우두커니 있다가 할 수 없어서 ‘교살의 가능성이 많은데요.’ ‘교살?’ ‘목을 졸라 죽인 것 말입니다.’ 라고 대답은 했지만 정말은 눈 감아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어요. 만일 그랬다가는 우리들의 의사 사이에서 큰 비난의 대상이 되죠. 거짓말이라도 해서 덮어 주지 못한 내 자신이 정말 한심스러웠지요. 그 당시는 난 영문을 몰랐는데 어떤 예감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그 집은 이 스무 살에 아이를 낳은 딸과 열일곱 살의 남동생‥‥‥ 일품을 팔아 생활하고 있었고 그 외는 팔십이 다 된 늙은 할머니뿐으로 이 할머니는 망령으로 아무 것도 모르고‥‥‥”

“죽은 아이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인가요?”
마테오 신부는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물었다.
“아니죠. 그 열일곱 살 난 남동생이었습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문제가 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남동생이었으니까 의사에게도 보일 수가 없었겠지요. 두 사람 다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있어 배가 불러 온 것을 숨기고 있었거든요. 남매간에 생긴 아이니까 처음부터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혼자 몰래 낳아서 처음부터 죽여 버릴 생각을 했겠지요. 헌데 낳을 때 진통으로 고함을 질렀을 것이고, 또 아이 울음소리가 났으니 마을 사람들이 이상해서 가 봤을 거 아니겠습니까. 아이를 낳자 곧 죽었다고 그 딸이 말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경찰에 알렸다는 경우였지요.”

“만일 임신 중에 와서 고백을 하고 선생님에게 매달렸다면 선생님은 뭐라고 답변하시겠어요.”
“남매간에 생긴 아이라고 해서 뭐 어떻겠냐고 했겠지요. 아마 고대 이집트의 왕조에서 남매간의 결혼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잖아요. 잘 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생긴 것은 어쩔 수가 없으니 낳아서 기르라 해야겠지요.”
“그것이 의사의 윤리입니까?”
“그 점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의 윤리를 아마 임신 중이라면 중절을 시켜주는 것이 도리겠지만 나는 잘 모릅니다. 나 혼자만의 독특한 윤리를 내세우면 동업자간에 물의가 일거든요. 중절할 수 있는 자격조차 박탈당해요. 그렇게 되면‥‥‥ 나는 겉으로는 우리들의 양식에 따라서 의사인 척은 하고 있지만 진정한 양식은 아니지요. 신부님의 세계에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절은 살인이니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남매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셔야 되겠습니까?”

“난 교회법이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남매 사이를 결혼시킬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 아버지를 밝히지 않고 기르면 되지 않을까 해요. 아니면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을 피하고 싶으면 멀리 양자로 주든지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렇죠. 나도 그 당시 그렇게 생각했지요. 이런 집에서 키우는 것보다는 양자로 주는 것이 한결 나을 거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결코 큰 소리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의 환경이나 아니면 부모에게서 멀리 떠나고 싶은 아이들도 이 세상에는 더러 있는 것도 확실하거든요. 하여튼‥‥‥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연옥이 누님의 집에서 신부님과 이렇게 이야기 나누고 있으면 참 자유스럽군요. 딱딱한 법도 값싼 도덕관도 이 별장의 공간 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는 상쾌한 기분입니다. 종종 만나고 싶습니다.”
“저도 오늘 정말 유익한 공부가 되었습니다.”

창밖에서는 자꾸만 바람이 세차게 울부짓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양씨 부부와 진찰실에서 첫 인사를 나누었다.
“빨리 오셨군요. 박연옥 여사가 빨리 가 보라고 조른 것은 아닙니까?”
“아니, 저희들이 오히려 하루라도 급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남편인 양우석 씨가 명함을 내 놓으며 말했다. 명함에는 ‘주식회사 한성 상무이사’ 라고 적혀 있었다. 양우석 씨는 눈망울이 시원스럽게 크며 얼굴은 동안이었다. 걸을 때는 오른편 다리가 불편한 것 같이 다소 절룩거렸다. 아내인 이서영은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화사한 얼굴이었다.
남편이 동안인 탓인지 아내 쪽이 한두 살 위로 보였다. 한 박사는 이러한 인상 파악으로 인해 과거에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암으로 찾아온 칠십대의 할머니와 함께 온 남자를 아들이라고 잘못 알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두 살 아래인 그녀의 남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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