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천년, 미래를 위한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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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년, 미래를 위한 외침!
  • 범상 <석불사 주지·칼럼위원>
  • 승인 2018.03.29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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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년을 알리는 홍보물이 나부끼고 각 단체들은 행사준비에 분주하다. 이웃 예산은 홍주보다 100년 앞섰다며 열을 올린다.

지구 나이는 어디서든지 똑 같다. 그래서 시간을 역사라 하지 않는다. 역사는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되고 조망 되는 사건들이다. 홍주천년이라는 시간과 홍주역사는 다르다. 한 조각의 유물이 역사적 가치와 골동품의 가치가 다르듯이…․

학계에서는 홍주정신에 대해 이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천년이라는 시간동안 일관되게 사건과 사건으로 이어지는 변함없는 정신이 있을까?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홍주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엇! 등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때까지 홍주정신을 충절이라 했다. 그러나 한 왕조가 500년을 지속해오며 전국 방방곡곡에 충신열사를 배출했다. 이에 대해 손세제는 임한주의 ‘홍양기사’를 들어 “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은 일을 한다”는 사생취의(捨生取義)를 주장한다.

충절이 한국인의 일반 정서라면 사생취의는 명확히 정리되지 못한 근현대사를 수용한 고육지책이라고 본다. 사생취의에서 ‘옳음’의 의(義)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논어’에 근거한다. 하지만 국가간 이해 충돌에서는 그 기준이 모호해진다.

근현대사는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자주성 보다는 ‘콜럼부스의 신대륙발견’이라는 식민사학을 지지하고 있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은 ‘원주민은 사람이 아니다’를 전제로 한다.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의’는 상대의 생명을 빼앗음을 정당화한다. 전쟁으로 평화를 지키겠다는 미국의 모순처럼 말이다.

홍주정신을 규명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홍주천년은 세계를 향한 큰 외침이어야 한다. 마치, 홍성출신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듯이 말이다.

지난 과거는 충절 또는 사생취의로 정리한다 하더라도, 미래를 향한 외침은 인류사에 기록될 만 한 것이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옳고 그름은 상대적 개념이다. 충절과 사생취의 역시 상대를 전제로 한다. 집단간 대립과 갈등으로 살아온 인류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4차산업을 말하는 지금 지구를 멸망시킬 만큼의 핵무기가 있고 기술은 보편화됐다. 쉽게 말하면 핵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 개념은 더 이상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될 수 없다.

과학은 인류화합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만해는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라”고 답한다. 만해의 민족주의는 결이 다르다. 일본이 정신대, 징용, 난징대학살 등을 벌였고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을 내세워 유대인을 학살했다. 만해가 민족을 강조한 것은 제국주의로부터 전 인류의 인권과 평화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하루빨리 서양(일본)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루고, 제국주의에 나서자는 주장에 대해 “우리가 제국주의로부터 받는 고통을 다른 민족에게 똑 같이 가할 수 없음”을 강변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공자의 충서(忠恕)와는 다른 일체, 즉 사해동포는 하나라는 것이다. 마치 하나를 빼면 전체가 성립될 수 없듯이…․ 그래서 만해사상은 “조국의 독립을 방편으로 인류평화와 인권을 구현하려 했다”고 정의 된다.

따라서 홍주천년은 “만유 생명이 가지는 본연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평화를 구현해 모두가 행복해지는 지구촌을 만들자”는 인류사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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