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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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22>
  • 한지윤
  • 승인 2018.04.1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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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자넨, 언제나 한가할 때쯤 되면 오네, 그려.” 며칠 휴가 다녀올 동안 대신 진료하기로 한 천세풍 박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 박사는 농담을  했다. 한 박사는 온양으로 휴양차 갈 때에는 언제나 인천시내에 들려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간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둘도 없이 효성이 지극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마마보이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머니인 이순실 여사는 일흔넷이나 되었는데 인천의 옛집에 그대로 혼자 살고 있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와서 빨래나 집안 청소 같은 것을 도와주고 있었으나 그 외 다른 것은 혼자하며 살고 있었다. 항상 머리도 단정히 빗고, 옷도 점잖게 입는 깔끔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지주집의 딸이었다고 하는데 대가 집 마님 같은 풍모를 풍기는 여자다. 그녀는 호적상으로는 한 박사의 생모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생모가 아니었다. 한 박사의 생모는 전명옥 여사로서 부산에 살고 있었다.

전 여사는 옛날 한 박사의 부친이 근무하던 은행의 은행원이었다. 한 박사의 부친은 서울의 본점에 근무하고 있었고 전 여사는 부산지점에 근무했었다. 부친이 부산지점에 출장을 가서 머무는 동안 그 당시 서른 가까이 된 전 여사에게 끌렸던 것이다. 그 동안의 경위는 잘 알 수가 없으나 자기가 근무하는 은행의 은행원과 깊은 관계를 맺은 부친이 큰 문제를 남기지 않고 넘어간 것은 전명옥 여사가 낳은 한 박사를 호적상의 어머니 이순실 여사가 자기가 낳은 것으로 하고 곧 데리고 와서 키웠기 때문이었다. 전 여사의 부모에게 한 박사의 아버지가 상당히 많은 위자료를 주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 한 박사의 부친은 서른아홉, 양모인 이순실 여사는 서른셋, 생모인 전명옥 여사는 스물아홉 이었다.

한 박사는 이순실 여사를 친어머니로 알고 세 살 위인 이순실 여사의 딸을 친누이로만 알고 자랐다. 그 후 부친으로부터 어머니는 다르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이 여사가 생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 한 박사는 양모를 더 진심으로 존경하고 친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혼자 살지 못할 날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 여사는 부친이 죽은 후에도 한 박사와 같이 살자고 하는 일은 없었다. 죽은 부친과 누이의 묘에 자주 가는 것을 보면 쓸쓸하고 외로울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런 내색 하나 없이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마음도 약해져 있을 것이고 돈도 남아 돌 정도는 아닌데도 한 박사에게 보조를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한 박사는 때대로 어머니를 마음 편하게 해 주고 싶었고 한편 가엾은 생각도 들었다.

양어머니는 이미 옷치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조그마한 여행용 백 하나를 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게 하는 것이나 여행을 할 때는 짐을 적게 하는 것이 여자로서,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한 박사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따로 과자상자로 보이는 보자기를 하나 들고 있었다.

“영등포에 좀 들러서 가야지?”
영등포라는 곳은 한 박사의 생모인 전여사의 집을 말하는 것이다.
“영등포에요?”
한 박사는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조금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 앞을 지나면서 들리지 않는 것은 나빠요.”
“들려서 가도 좋습니다만‥‥‥”
“이 근방을 지나던 길이라 하고 인사쯤은 하고 가야해요.”
차가 출발하고 나서 한 박사는,
“지난달에도 이상한 말을 해 왔어요. 그 분은.”
하고 말했다. 그 분이란 생모인 전명옥여사를 말한 것이다.

“2천만 원만 달라는 거예요.”
“그래?”
“유우조라는 그 분의 아들이 노름을 해서 빚을 진 것 같아요. 장사에 쓰는 재료를 구입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끝에 우조가 노름에 손을 떼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아마 돈을 탕진한 모양이죠. 우조의 노름빚이 아니라면 좋지만‥‥‥.”

전 여사는 한 박사를 낳고 10년가량 있다가 유명호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유명호는 토목용 골재인 자갈모래의 채굴업을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한 박사는 만난 적도 없었다. 전 여사는 유명호와 결혼해서 사십이 넘어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유우조다. 유우조는 목수였다. 재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노름에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가 서른이 넘어도 결혼도 하지 못했고 때때로 노름빚을 지고는 그 어머니에게 떠맡기고 그 어머니는 그것을 자기네 모자의 힘으로 해결할 노력은 하지 않고 한 박사에게 부탁해 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2천만 원을 한 박사가 주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이점이 이 노부인의 현명한 처신이었다. 마흔이 된 한 박사가 그런 경우 돈을 주었거나 말았거나 자기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태도였다. 보통 어머니라면 내게는 2십만 원도 주지 않고 생모인 전 여사 에게만 준다고 투정이라도 할 것이었다.

전 여사의 집은 영등포역에서 바라보이는 지금의 신월동쪽 언덕 위에 있었다. 아들이 목수이니 좀 더 깨끗하고 그럴 듯한 집에 살고 있을 듯도 한데 대장쟁이 집에 식칼이 없는 격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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