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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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26>
  • 한지윤
  • 승인 2018.05.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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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할머니는 잠자리에서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아요.”
유리는 한 박사의 방으로 다시 와서 과일 바구니를 들여다보면서,
“아빠, 엄마가 먹고 있는 제주의 귤과 이것은 어느 것이 더 맛있어?”
한 박사는 오랫동안 개업의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잠깐잠깐 자는 데는 익숙해 있었다. 적당히 취하고 잠도 오고해서 어머니와 딸과의 대화를 흘려 듣고 있었다. 그 때다. 머리맡의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프런트의 김진우입니다. 조금 전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어, 아니 오히려 이쪽에서 신세를 많이 졌는데 과일은 뭐하러 보냈어요? 괜히 폐만 끼친 것은 아닌가 싶어서,”
“또 전화 같은 걸 걸어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쾌히 승낙하셨다는 것을 형에게 전했더니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여기에 와 계시다면 왕진을 오실 수가 없을까 하는 말이었습니다. 말씀 드리기가 송구스럽습니다.”
“왕진이라. 글쎄‥‥‥”
무리한 일이라 생각은 했으나 딱 거절은 하지 않았다.

“형수란 분이 벌써 사십이 가까운데 무어라 말씀 드려야 할지, 옛날 풍의 좀 고집스런 면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병원이라고는 치과병원 이외는 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까지 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 쪽이라고 한 박사는 생각하고 있었다. 내과와는 달라서 산부인과는 가능한 드라이하게 해야 한다. 환자를 당사자의 침실에서 진찰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불편하다기 보다는 진찰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한 박사의 침묵의 뜻을 눈치 빠른 김진우가 모를 리가 없었다.

“형은 선생님께 폐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내일은 우선 형수님을 만나 보시고 선생님과 낯을 익혀 두시면 혹시 본인이 병원까지 진찰을 받으러 갈 기분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입니다. 항상 기저귀 생활을 하는 사람이니 여행은 물론, 집에서 밖으로 나간 일도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 해 주신다면, 그동안  할머님과 따님은 제가 적당한 곳으로 편히 안내해서 쉬시게 하다가 점심때쯤 형의 가게로 모시고 와서 같이 점심식사를 했으면 싶습니다.”
“그래요. 그럼‥‥‥알겠습니다.”

한 박사는 말했다. 김진우라면 어머니나 딸에게도 자기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충분한 서비스를 해 줄 것이다. 진찰은 불구하고 이야기라도 해 주면 김진우도 납득할 것이라고 한 박사는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근처의 산과 들은 어느덧 오색단풍으로 덮여 있었다. 호텔의 창문에서 보이는 산과 들은 아름다웠다. 한창 절정기에 이른 단풍은 정말 장관이었다. 어제 저녁에는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천의사가 응급환자로 도움을 청해 오는 전화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놓이지 않고 있었으나 위스키의 탓인지 아침 여덟 시까지 푹 잘 잤다. 눈을 떠 보니 옆방에서는 할머니와 손녀딸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할머니, 나 배고파.”
“조금 참아요. 이 호텔 식당은 이렇게 빨리 열지 않아.”
“유리야! 일어났어?”
한 박사는 옆방에 대고 소리쳤다.
“아빠, 굿모닝?”
유리는 잠옷 바람으로 달려왔다.
“나 말야 배가 고파 죽겠단 말야.”
“뱃속에 배가 하나 더 들어 있는가? 어제 저녁에 과일 먹지 않았어?”
“과일에는 아빠가 잡수시는 알코올이 들어 있지 않았어.”
“그렇군. 그럼, 아빠 세수하고 밥 먹으로 가자.”
“야아. 만세!”

한 박사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오늘쯤은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일어나서 전기면도기를 얼굴에다 댔다. 한 박사는 호텔의 식당에 오면 평소 집에서 잘 먹지 않는 것을 주문해서 먹는다. 가령 오트밀같은 것 등을 말이다. 오트밀은 간을 맞추기가 대단히 어려워서 서민생활에는 맞기가 어려운 음식이다. 청어요리는 영국의 여왕도 좋아 한다는 풍문도 있지만 통조림으로서는 많이 팔고 있으나 통을 따고 먹기가 귀찮은 것이다. 유리는 돈가스를 먹고 있었다. 야근을 마친 듯한 프런트의 김진우가 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잠자리에 불편하신 점이라도 없으셨습니까?”
“잘 잤어요. 오늘 아침도 이 예비숙녀가 배가 고프다고 깨울 때까지 잤는데.”
“아, 그렇습니까? 오늘은 공교롭게도 비가 조금 왔습니다만, 곧 날씨가 좋아진다는 예보입니다. 상관없으시면 따님을 아이스 스케이트에 모시고 싶습니다.”
“아이, 좋아. 아이스 스케이트 해보고 싶었어, 나.”
“할머님도 함께 가십니까?”
“난 한 번 더 목욕하고 나서.”

어머니가 항상 집을 비우는 탓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직업이 손님을 많이 대해서 그런지 유리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잘 따랐다.
“프런트의 김진우 아저씨는 스케이트를 잘 해요.”
하고 한 박사가 말하자 좋아 하면서 따라가고 싶어 했다.
열시 가까이 되어서 한 박사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천천히 목욕이라도 하시고 푹 쉬세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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