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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30>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옆 사람이 지금 한창 바쁘거나 급한 일이 있는데도 무관심해 한다거나 자기가 지금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걸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겐 모멸감을 가질 정도였다. 조금 전부터 한 박사는 자기의 생각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민영이가 자기의 신체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지도 않거니와 병에 대해서도 절망적이 아니라는 것, 그 둔감성이 한 박사의 마음을 음직이기 시작한 것 이었다.

“내 모교인 대학병원에 소개해 드릴 테니 그 곳에 가셔서 수술을 받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 부인도 상당히 좋아지실 걸로 여겨집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조금 더 지체하셨다가 호텔의 할머님과 따님이 오시거든 별실에서 천천히 불고기라도 잡수시도록 해주십시오. 이건 감사한 마음의 표시이긴 합니다만‥‥‥”
김영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언제 준비한 것인지는 몰라도 보기에도 두툼한 봉투를 내미는 것이었다.

한 박사는 아내인 이윤미가 오후 1시에 비행장에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러나 비행장까지 마중을 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오후 1시라고 하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아닌 보통날은 병원일로 인해 그 시간에 갈 수도 없는 일이다. 이윤미는 한 박사가 마중을 나왔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안 될 일인 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윤미는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는 여자다. 한 박사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오후 1시경 한 박사는 진찰실에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찾아온 모녀의 환자를 맞았다.

“어떻게 오셨죠?”
한 박사는 먼저 딸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차트에 의하면 환자는 딸이었다. 좀 여윈 듯하고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한 박사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실은 딸애의 생리가 근 반년이나 없어서요.”
어머니란 사람은 사십대 중반의 여성으로서 품위가 고상해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최종 생리는 언제 했나요?”
한 박사는 웃으면서 차트에 기록된 주소와 성명을 보았다.
집은 성남으로 되어있고 이름은 안기옥 이었다.
“작년 7월쯤 이예요.”
작은 목소리였다.
“대학생인가?”
“네.”

“지금까지 생리가 늦거나, 몇 달이고 없었던 적이 있었어요?”
‘가끔 불순할 때가 있었어요.“
“어느 정도?”
“3,4일 늦을 때도 있었고 그전에는 1개월 정도 비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생리가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달리 기분이 언짢거나 불편한 점은?”
“종종 아찔할 정도로 어지러울 때가 있어요.”
의료보험에 들어 있는 그녀의 아버지는 서울의 유명한 재벌 회사의 중견직원이었다.
“검사해 봅시다. 먼저 화장실에 가 소변을 받아와요.”
생리가 없다고 하면 먼저 임신을 의심해야 한다. 이럴 때 어머니가 옆에 같이 있으면 환자에게 곤란할 때가 있다. 작년의 일이었다.
한 박사는 여자대학생을 진찰한 적이 있는데 딸이 임신했다고 하자 함께 온 그녀의 어머니는 펄쩍뛰며 오히려 한 박사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내 딸 아이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라며 ‘절대’에 힘을 주고 한 박사에게 대든 적이 있었다.

결국 그 여대생은 임신 중기의 중절이라는 꽤 까다로운 수술을 받았으나 그래도 그녀의 어머니는 현실을 믿지 않으려 했다. 할 수 없이 한 박사는 수술로 끄집어낸 5개월의 태아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 태아만은 딴 곳에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얼굴을 하는 것이었다. 한 박사는 그 일을 천세풍 박사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그럴 때는 어머니를 수술현장에 입회시키는 방법밖에 없겠지요”하고 천세풍 박사가 말한 적이 있었다.
한 박사는 어머니와 그 딸이 진찰실을 나간 뒤에 다음 환자를 불렀다.
오늘은 환자가 붐비고 있었으므로 진료의 능률을 올려야만 했다.
“경자 씨군요. 어떻게 오셨지요?”
한 박사는 앞에 앉아있는 환자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직업적인 습관이다. 예의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전혀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 조금 냉이 많아서 진찰을 받았는데 암인지 모른다고 해서······”
한 박사는 처음으로 눈을 들었다.
김경자·스물아홉 살·기혼·두 아이를 두고 있다. 검정색 스커트를 입고 핑크빛에 녹색이 섞여 있는 쉐타를 입고 있었다.
“언제 그런 진찰을 받았죠?”
“2달 좀 전에요.”
“어느 병원에서?”

이런 질문은 한 박사로서는 즐거운 일이 못된다. 누가 뭐라고 하거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진단을 내린 병원이나 의사의 이름 같은 것,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 된다. 인간이란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도 확인하고 싶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있으므로 자기 자신의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하태명 선생님에게서 진찰 받았어요.”
한 박사는 그랬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지도 않았다. <계속>

한지윤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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