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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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42>
  • 한지윤
  • 승인 2018.09.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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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한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잠자코 있는 모녀를 입원실에 둔 채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내는 매일같이 어딘가 외출을 하고 있었다. 집에 있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그렇게도 갈 곳이 많은 것인지 한 박사는 몰랐다.
물론 굳이 물어 본다면 백화점에 세일이 있다거나, 서울의 디자이너에게 양장을 맞추러 간다거나, 입원해 있는 친구의 병문안을 간다거나 하는 제 나름대로의 구실이 있을 것이다.
한 박사는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매일 제시간에 병원에 출근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병원이 가장 마음 편한 곳이라고 생각되어서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 박사도 아내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느 날 임신중 씨 부부가 오랜만에 함께 병원을 찾아 왔다.
“오래간만입니다.”
한 박사는 두 사람을 반기면서 말했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내인 신수경 씨는 안경 속에서 밝게 웃고 있었다.
“바깥양반께서는 아무 병도 없으신데……”
“아, 이번에는 제가 좀 이상해져서……”
“어떤 증세입니까?”
“생리가 없어요. 제 친구도 서른여덟에 갱년기 증세가 생겨서요. 혹시 저도 그렇지 않나 해서……”
“부인께서는 아직 갱년기 나이가 아닌데요.”
“바깥양반을 치료해 주셔도, 제 쪽이 나쁘다면 허사가 될 것 같아서요.”
“근래에는 쭉 정확했나요?”
한 박사는 신수경 씨에게 물었다.
“네, 2,3일 정도쯤 틀리는 수는 있어도……”
“이 번에는?”
“벌써 10일 전에 있어야 하는데도…… 얼마 전부터 집을 수리하고 있지요. 그래서 목수가 출입하고, 미랑이가 오고 집이 어수선해요. 목수가 데리고 온 조수가 대패 밥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불을 아무데나 버리고 해서 골치 아파요. 주의도 시키고 신경을 쓰는데도…… 혹시 신경을 너무 써서 그런 게 아닌가 해서……”
“그래요? 진찰이나 해 봅시다. 부인께서는 소변을 받아 오셔야 되겠습니다.”

잠시 후 두 부부는 진찰실에서 나갔다. 이 우등생 환자들에게서 너무 자기가 신뢰받고 있구나 싶어 어쩐지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들어온 환자의 얼굴은 한 박사로서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차트를 보자 조금은 기억이 떠올랐다. 남편이 장거리 트럭을 운전하고 있다는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 전에 출혈이 있어서 왔었지요? 유산이 될 것 같아 주사 맞고 약을 가지고 갔는데 그 후 어때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 후로는 여기 온 적이 없지요?”
“네. 어째서?”
“어째서 보다, 피가 이내 멈췄거든요. 그리고 1개월이 지나서 지금 이렇게 와 봤어요.”
“그렇겠군……”
위로 아이가 둘이나 있고 집안 일 때문에 입원 같은 건 할 수가 없다고 버티던 일들을 한 박사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주머니, 그 때 자전거 타고 왔다고 했죠?”
“네.”
“그 자전거 그대로 두고 갔었나요? 유산이 염려될 때에는 자전거가 가장 위험하다고 말해드린 것 같은데.”
“그렇게 할까도 했는데 나중에 가지러 올 사람도 없고 걸어가는 것은 멀고 해서 그냥 타고 갔어요.”
그럴 것이라고 한 박사는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아무튼 위험합니다.”
한 박사는 격식대로 태아의 심음을 조사했다. 들려오는 심음은 의사의 걱정 같은 것을 비웃기라고 하는 듯 아주 정상적이었다.
임신중 씨 부인이 그 다음 불리어 들어올 때 한 박사는 조금 의식적으로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인,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
“네-엣! 정말 이예요?”
 “저도 놀라고 있습니다.”
“벌써 검사가 끝났어요? 주인어른을 불러와도 좋아요?”
하고 부인 신수경 씨는 확인이라도 하듯 물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한 박사는 그 사이 데스크 앞에 앉아 있었다. 꼭 큰 복권이라도 당첨된 기분이었다. 복권이라고 생각한 것은 노력해서 계산대로 된 일과는 달리 임신중 씨 부부는 조금도 기대하지도 않은 당첨이라는 기분을 씻을 수가 없었다.
곧 만면에 웃음을 띤 임신중 씨가 아내의 뒤를 따라 진찰실로 들어왔다.
벗겨져 들어 간 이마도, 안경도, 눈 끝도 모두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선생님.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죠. 정말 고맙습니다.”
임신중 씨는 한 박사 앞에서 몸 전체가 녹아 구부러지듯 즐거운 표정으로, 정말 기쁜 것 같아 보였다.

“고맙단 소리는 제 쪽에서 해야 될 것 같은데요. 나도 사실은 반신반의였습니다. 그 주사가 얼마나 효과가 있나 조차도 모르고서……”
한 박사는 비로소 본심을 고백한 셈이다.
“아니죠. 정말, 선생님 덕택으로 이렇게……!”
임신중 씨는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거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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