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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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45>
  • 한지윤
  • 승인 2018.09.2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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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중학시절에 존경하고 따랐던 학교선생님이 서울로 시집을 가서, 그곳엘 간 것 같아요. 거기서 그 선생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털어 놨대요. 설득이 되어 일단은 납득을 하고 비교적 밝은 얼굴이 되었다나 봐요. 그날 밤 너무 늦어서 선생님의 시어머니도 걱정을 하고 여고생이 혼자 어머니도 없는 집에 막차로 가는 것은 위험하니 자고 가라고 권했대요. 그날 밤, 부엌의 가스꼭지를 틀고……”
“연극이 아니던가?”
“선생님한테 유서가 있었대요. 때마침 선생님이 밤중에 화장실에 가다가 발견하고 병원에 옮겼다더군요.”
“글쎄나…… 자살미수로 몸이 많이 상했다면 죽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라……”
 “이영신 아주머닌 의외로 낙천적이던데요.”
“어째서?”
“딸에게 어떤 일이 생기든 살아있든 없든 폐인이 된다면 이제는 아이가 하나 더 있어서 잘 되었다고 생각한대요.”
그날 밤은 비가 오고 있었다. 한 박사는 집으로 퇴근하자 곧 박연옥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에는 집에 계시죠?”
“있을 거야.”
“가도 좋아요?”
“그래. 기다릴께”

한 박사는 은빛 철사와 같이도 보이는 세차게 뿌리는 빗속으로 차를 몰았다.
박연옥 여사의 별장에 도착했을 때 눈에 익은 고물차가 비를 맞고 주차해 있었다.
“한 박사가 온다기에 마테오 신부를 모셔 두었어.”
문을 열어 주면서 박 여사가 말했다. 아무렇게나 입은 체크무늬의 티셔츠 차림의 신부는 이미 한 잔 했는지 불그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비상하게 도는데.”
한 박사는 박 여사에게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지?”
“누님, 내가 말예요, 죄의 고백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한 박사는 웃었다.
“그건 오버쎈스. 만일 그렇다면 매일 신부님을 모셔다 두어야 될 걸.”
“그런가? 그건 그렇고 한 잔 주실 수 없어요?”
“윤미 씨는?”
“오늘은 서울에 숙박. 내가 순순히 보내 드렸지. 좋은 남편이죠?”
술이 들어가자 한 박사는 피로가 확 풀리는 듯했다.
“술 취하기 전에요. 누님의 미국인 친구, 아이를 양자로 하고 싶다는 그 친구.”
“로우리 씨?”

“응…… 그래요. 로우리 씨. 그 사람에게 알선해 주려고 내 상당히 힘썼어. 헌데 그게 틀렸거든. 그 외는 아직 그럴만한 곳이 없어서 그걸 말 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왕림했지.”
“그 로우리 씨는 말야. 여름에 온대. 조금 늦어지겠다고 편지가 왔거든. 그 동안에라도 누가 알아? 또 있을런지.”
“그만 해 두죠. 나는 그런 일 하는 것 서툴러요.”
“왜 안 됐지? 그 아이 말이야. 물론 양자로 주지 않겠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게 좋은 일이 아니란 말씀이야. 그 아인 로우리씨에게서 크는 것이 좋았을 걸요. 그 생모에게서 커 봐요. 자신이 조금도 바라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어머니의 노후 뒷바라지, 자기가 태어난 것이 싫어서 자살 미수까지 해 머리가 바보가 된, 아버지가 다른 누이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거든. 그야말로 채이고 밟힌 격이지.”
술기운을 빌어 한 박사는 이영신 모자의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환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이름은 말하지 않았으나 한 박사는 이영신을 ‘그 어머니’ 라고만 말했다.

“신부님, 이런 것을 그 쪽에서는 어떻게 보죠? 나는 의사로서 양심에 가책 받을 짓은 하지 않았어요. 다른 의사들도 모두 그럴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태는 최악으로 가고 말았어요. 그 때 내가 그 어머니 말대로 주사 하나면 자살미수로 바보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그러나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 어머니에겐 결국 살인을 했다는 기억을 항상 남게 할 것이 아닙니까?”
성직자로서 조금도 타협이 없는 어투로 마테오 신부가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만일 그 누이가 죽는다면 이 아이는 의식도 생기기 전부터 누이를 죽인 살인자가 된 거야. 자라서도 모르고 지나가면 별 문제지만, 만일 알게 된다면 이런 일은 굉장히 둔감한 놈이 아니면 아마 그 성격은 삐뚤어지고 말걸. 그와 반대로 만일 그 누이가 산다면 그 아이는 그 어머니와 폐인이 된 누이를 평생 돌봐줘야 되고 어느 쪽으로 굴러도 좋은 일은 하나도 없어. 차라리 로우리씨 같은 곳으로 양자라도 가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지.”
옆에서 듣고 있던 박 여사가, “난 다른 것은 몰라도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그 어머니가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란 점이예요. 아이를 낳은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 또는 호적에 기록된다는 것이 있는 줄은 짐작도 못한 점이예요. ‘호적이 더럽혀 진다’란 말 영어에는 없어요.”

“그게 서민의 감각이란 것입니다. 이런 것도 알아 두시죠. 누님!”
한  박사는 취한 눈을 반쯤 감으면서 말했다.
“세상은 어디 그런가요? ‘배가 불룩해진 책임은 자기가 져라’하는 거죠. 질 수가 없으니까 괴로워하는데, 그 결과 죽이거나 더 가혹한 결과가 되지. 버려주면 차라리 좋은 편이지. 신부님, 내가 만일 신부라면 성당 앞에 커다란 간판 하나 세우겠어. 죽이는 대신 여기에 버리시오’라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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