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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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53>
  • 한지윤
  • 승인 2018.11.2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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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양승묵이란 사람, 알고 있어?”
윤미는 조리대를 향해 등을 보이고 있었다. 손은 멈추었으나 이쪽을 돌아보지는 않고 말했다.
“알고 있어요. 왜요?”
“아니, 양승묵 씨 부인이 자기 남편이 당신을 만났다고 말해서…… 그 사람 딸이 오늘도 외래에 왔어.”
“좀 이상한 분이죠?”
“글쎄, 속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미인이던데.”
“승묵 씨는 하와이에서도 만났어요. 자기집안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 사람 부인 얼핏 보면 현모양처로 보이지만 형편없는가 봐요. 승묵 씨의 출장기회를 타서 상당히 바람피우는 바람꾼 인가봐요.”
“그 승묵이란 사람 LA에서 만났어?”
“아뇨. 처음은 하와이에서 백수 형부가 소개해 줘서, 내가 LA에 가면 거기서 또 만나자고 하면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어요.”

이백수란 아내의 사촌형부다. 은행원으로 현재 하와이에 파견되어 미국은행과 합작업무 같은 것을 하고 있다. 아내가 하와이뿐만 아니라 LA까지 간 것은 혹시 승묵이와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한 박사는 생각했다. 아내의 말이 그런지 어떤지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남자란 어느 정도 이상의 관계에 이르지 않으면 다른 여자에게 자기 아내의 불미스러운 행동을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른다. 아내가 자기의 출장 간 사이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의구심에서 승묵이가 아내에게 접근했는지, 아니면 승묵이가 출장이 잦아 그 부인이 일종의 보복으로 놀아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런 묘한 생각을 한 박사는 해 보았다.
“그 딸도 말예요. 엄마의 그런 생활을 싫어하고 있어요. 엄마의 행동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미장원에 갈 때도 몰래 뒤따라가는 일도 있다던데.”

원인은 별개문제로 하고 양영은의 그 부자연스런 거식의 배후에는 어머니같은 바람끼 여자가 되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나 하고 한 박사는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아내인 윤미와 승묵이란 남자의 일을 생각하면 물론 유쾌한 일은 아니다. 윤미가 집에 돌아왔을 때만해도 그렇다. LA에 꼭 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갔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느냐고도 묻고 있었다. 그 상대가 승묵이 인듯 싶었다. 아내는 승묵이와 같이 식사나 할 정도라고 간단히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 정도였을까? 불쾌한 생각과 승묵이란 사람도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바쁜 업무 중에도 윤미와 같은 단세포의 여자에게 접근했구나 싶어 한편으로는 착찹한 생각이 들었다.
한 박사는 냉장고의 문을 열고 맥주를 꺼내 유리잔에 따라서 선채로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때 무의식중에 선반에 눈길이 갔다. 배달 온 듯한 편지가 눈에 띄였다. 브라질에서 항공우편으로 온 박 여사의 편지였다.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정중한 말씨와 달필이 눈에 익었다.
‘지구의 뒤쪽까지 왔습니다’로 시작된 긴 편지였다. 한 박사는 뜯은 봉투는 한 손에 들고 한손은 편지 내용을 읽으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로우리 씨 부부도 함께 왔기에 어제는 이곳에서 ‘미혼모의 집’을 두 곳이나 견학을 했어요. 한 곳은 구세군에서, 또 한곳은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곳 이예요. 잘 알고 계시지만 이 나라는 가톨릭을 믿는 사람이 많아서 중절은 절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지요. 미혼의 아가씨라도 임신만 되면 꼭 낳아야 되는 법이예요.
구세군에서 경영하는 곳은 50명 정도 수용하고 있는 비교적 작은 시설 이예요. 비가 오고 있기에 빨래널이 터에서 본 풍경은 퍽 쓸쓸해 보였습니다.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필요한 것은 검소하게나마 모두 구비되어 있었어요. 마침 이곳에서 아직 앳띤 얼굴을 한 열네 살의 배가 불룩한 소녀가 낳은 지 얼마 안 된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기도 하고 기저귀를 갈고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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