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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갈무리 겨울의 길목에서

비바람이 친 가을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나뭇잎이 모두 땅에 떨어졌다. 이 스산함은 희망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 잎새’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따뜻한 날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아, 마늘 심어야 하는데…’

마을 집집마다 양지바른 곳마다 들깨며 콩대며 농산물이 서 있다. 한껏 볕을 받아 바삭한 그네들을 탈탈 털어내는 집, 그 바싹 마른 검불로 가마 불을 때는 집, 김장으로 형제들이 모여 떠들썩한 집, 지금 농촌은 가을걷이와 겨울 준비가 한창이다. 밭농사를 시작한 건 순전히 맥주 때문이다. 맥주는 보리를 발효시키는 술이다. 취미로 맥주를 만들어오길 두 해다. 올해는 직접 보리를 심어보기로 했다. 동네 형에게 밭 한쪽을 빌렸다. 농촌진흥청에서 보급하는 겉보리 ‘혜미’도 주문했다. 보리는 손으로 뿌려도 된다고 한다. 열의가 너무 셌나 싶다. 매년 직접 엿기름을 내고 엿을 만드는 동네 이모가 나를 믿고 보리를 안 심었다고 한다. 임전무퇴 배수진이다. 이모는 당신이 가진 보리 모두를 엿기름으로 만들었다. 장화를 신고 갈퀴를 들고 장엄히 보리밭으로 향했다. 보리를 뿌린 후 갈퀴로 흙을 슬슬 긁어 보리가 흙에 들어가도록 해준다. 밭을 긁는 내내 이걸로 과연 보리싹이 날는지 의구심이 돋는다. 다행히 보리싹이 났고 새싹 앞에 엎드려 나는 감동한다. 참새 혀 같은 순에 가까이 다가가 앉으며 나는 엿기름 이모를 떠올렸다. 안도의 한숨이 난다. 하지만 너무 오밀조밀 심었다. 서로 너무 가까우면 쓰러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말이다.

조상님들은 낫 놓고 기역 자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를 위해 남기신 말인가 싶다. 서리 내릴 때 거둔다고 해 서리태(콩)다.

나는 얼마나 부지런해 추석 전에 전부 베었을까. 그래도 비 오기 전에 거둬 가매 펴 가매 가을볕에 잘 말렸다. 서리가 내리니 슬슬 털어볼까 한다. 더 추워지기 전에 마늘과 양파도 심어야 한다. 진즉에 얻어놓은 마늘을 쪼갠다. 물 빠지는 길을 내고 줄 맞춰 마늘을 심는다. 생각보다 간단한 마늘 심기. 금세 한 접을 심었다. 양파까지 내쳐 심는다. “보나 마나 알이 작을 걸?” 전화기 너머 아버지는 자식의 첫 농사를 호언장담했다. 강매로 보답해야겠다.

“내년 봄에는 산호랑나비가 되는 거야. (중략) 내년을 약속하는 건 좋은 거 같아. 자신이 내년에도 건강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금, 좋지 않아? 마음의 씨앗이 팟 하고 터지는 듯해.”-마스다 미리, ‘주말엔 숲으로’ 중

절인 배추는 항아리에서 익어가고, 감은 홍시가 되고, 장롱 옆에 둔 고구마와 끝물 고추로 담근 장아찌는 긴 겨울 양식이 된다. 토란대를 꺾어 말리며 뜨끈한 육개장을 상상하고 저 스스로 자란 결명자를 거둔다. 벌여놓은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지금 여기의 하루하루가 내가 되어간다. 정원에 묻어둔 수선화, 튤립은 긴 겨울을 이겨낸 새봄의 선물이랄까. 내년, 새로운 시간을 기대한다.

이동호 <홍동면>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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