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아물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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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아물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흔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9.06.2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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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을 보내며…

■ 전쟁이 일어난 날을 ‘기념’한다고?
지난 25일은 6·25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9년이다. 한국전쟁 제69주년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정부를 비롯한 전국의 자치단체, 관련 기관단체 등 여기저기서 기념식이 열렸다. 그런데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을 여기저기서 ‘기념’한다는 사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이유는 무얼까? 한국전쟁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북한의 남침이라는 사실은 일반적 통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인식돼 왔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1950년 6월 25일은 대한민국이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침공을 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정부와 자치단체 등은 전쟁이 끝난 날도 아닌 침공을 당한 날을 ‘기념’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보통의 ‘기념’이란 단어는 결혼기념일, 독립기념일, 전승기념일과 같이 좋은 일에 사용하는 단어가 아닐까. 죽음, 이별, 패배, 패망, 침공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기념’이라는 단어가 과연 진정으로 어울리는 단어일까. 하지만 우리 정부와 자치단체 등 관련 기관단체에서는 유일하게 ‘6·25한국전쟁 ○○주년 기념’이라는 비극의 날을 기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세계 모든 나라는 정반대로 기념을 한다고 한다. 이들 나라는 전쟁에서 침략당한 날을 기념하지 않고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것은 상식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침공을 막아내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해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을 기념해야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닐까.

■ 6·25 한국전쟁은 처절한 비극
실로 6·25 한국전쟁은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민족 최대의 처절한 비극이다. 아직도 6·25 한국전쟁 당시 무참히 자행된 양민학살 문제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난 1999년 미국 AP통신의 발표로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사실로 드러났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학살지는 전국에 분포하고 있으며, 정확한 장소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 4·3항쟁의 경우 2만5000~4만 여명, 여순 항쟁의 경우 4000~5000여명 대부분이 양민학살이다. 여기에 더해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민간인 대학살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1950년 6월~10월 경 우리나라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인민군 점령이 늦은 지역일수록 민간인 학살 피해는 더 컸다고 전해진다.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전국의 800여 곳이 넘는 지역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 학살자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가슴이 먹먹한 채 긴 한숨으로 70년의 세월을 고통스럽게 한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69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유해들이 전국 곳곳에 방치돼 있는 것이 현실의 상황이다.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거나 발굴조사가 진행되다가 중단된 곳도 부지기수에 이른다. 홍성지역의 경우 광천의 폐광 굴에서 발굴한 유해도 안치할 안치소가 없어 용봉산골짜기에 임시로 마련한 콘테이너 박스에 임시로 안치해 놓고 있는 실정이다. 기가 막힌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후로는 실상 관심이 전혀 없다. 추모공원이라도 조성해 편안하게 안식을 취하도록 하는 배려와 관심, 정책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정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은 홍성의 문제이니만큼 홍성군과 홍성군의회라도 관심을 갖고 처리해야할 일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 과거 노무현 대통령 “공식 사과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민간인학살에 대해 공권력에 의한 죽음임을 인정해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문재인 정부도 진실화해위원회를 부활시켜 진상규명을 계속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인 채로 머물러 있다. 오죽하면 유족들이 울부짖음 속에 “이게 우리나라 법이여! 개똥같은 법이네~”를 외쳤을까? 이 정부와 여당은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지킬 생각도 없는 듯하다.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 등 관련 7개 법안은 국회에 계류돼 논의조차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은 ‘과거사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지만 ‘소귀에 경읽기’격이다. 분명한 것은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한, 한국전쟁은 지금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 광천 폐광 굴 발굴유해 유족 찾아
6·25 한국전쟁 당시를 경험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는 국군과 경찰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곳 홍성지역에서도 1950년 7~12월경에 홍성 소향리 붉은고개, 용봉산 용봉사 입구 골짜기 등 100 여명, 홍북 대동리 뒷산 교통호, 동방송 골짜기, 용봉산 냇가 40여명, 광천 담산리 금광구덩이 37명, 결성 폐금광 영장골 방공호. 공동묘지 방공호 100여명, 은하 대천리 공동묘지 방공호 50~60명, 구항 오봉리 뒷산 4명, 금마 지서 뒤 화양리 안골 50여명, 홍동 원현리 금광구덩이, 송월리 모래천변, 홍동지서뒷산, 홍동초 뒷산 150여명, 장곡 가송리배밭 교통호, 장곡초 뒤 방공호, 산성리 하천구덩이 산성리 덕곡 100여명, 갈산면 불상지 6명 등으로 집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유해발굴로 용봉산골짜기를 비롯해 광천 담산리 폐금광 등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이 벌어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어느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됐는지, 어느 곳에 묻혔는지도 모른 채 70년의 세월을 보냈다. 서산, 태안, 아산 등 인근 지역을 비롯해 전국적으로도 곳곳에 아직도 상흔이 아물지 않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광천 오서산의 폐금광 굴에서 발굴된 민간인 학살자의 유해 중에서 DNA검사를 통해 후손 몇 명은 69년여 만에 아버지의 뼛조각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돼 불행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다. 발굴된 유골과 친자식임을 확인하는 기막힌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역사의 흐름과 함께 도도히 숨 쉬며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유가족들의 뼛속을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관계자는 “전국에는 150개가 넘는 유해 매장지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며 “정부가, 정치권, 국회가 과거사법 입법 관련해서 대승적인 결단을 내려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이 될 때까지 유해발굴 사업을 지속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결과 전쟁을 기념하는 구시대적 행태는 개선하거나 중단돼야 할 것이다. 평화를 지향하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행태들은 모두가 청산돼야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메아리 친 핏빛 절규 대신에 평화로운 세상을 기대해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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