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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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4>
  • 한지윤
  • 승인 2019.08.0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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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윤의 청소년 역사교육소설

하기야 가뭄에 콩 나듯 어떻게 해서 벼슬을 얻었던 예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관에서 징발하는 부역, 병사 등에는 빠짐없이 선발되니 농자의 지위도 분망(奔忙)했던 것이리라!
이처럼 분망했던 농경사회에서는 남녀유별이라는 엄한 교육이 있었으면서도 농사에 여인들의 손길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족의 아내나 관헌의 아내가 어찌 호미를 잡고 평민의 남녀와 어울려 김을 매고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으랴.

이 같은 풍속은 유도(儒道) 정치가 도입되는 고려조 이래 이조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졌던 풍토로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역할도 이에 따라 생활환경이 크게 변화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권세가와 호족(豪族)의 가문이라 하더라도 여자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고 이름 석 자나 쓸 줄 알고 가사의 기록이나 할 줄 알면 되던 시대였다. 그러한 어머니가 어떻게 자식에게 글을 가르쳐서, 과거 급제할 수 있는 인재(人材)로 키울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아들의 교육은 훈장(訓長)에게 의뢰해야만 했다. 따라서 여인은 남편의 출세를 내조하는 것과 집안 살림을 돌보는 범위로 축소가 된 것이다.

더욱이 농사일에 있어서도 남녀유별이란 장애적 요소가 가로막아 노비들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상 농자(農者)는 천하의 근본으로 알던 시대라 관헌들의 녹봉도 밭으로 주었다. 그렇다면 관헌의 가족이 직접 그 밭을 가꾸고 농사를 지었어야 농자가 천하의 대본이란 정신에 어긋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직책과 권한은 오직 이름 그대로 ‘안방마님’으로 집∙울타리 밖을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들의 활동범위가 줄어들면서 자식들의 교육이나 가정생활의 발전되는 정도가 축소됨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같은 농경사회를 구성했던 고려조와 이조시대에 이르러 여인들의 권리가 말할 수 없이 미약했으므로 위대한 인물의 배출이 적었다. 따라서 몽고족의 침략, 거란족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다가 드디어 일본의 침략마저 받았던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어머니들은 그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이다. 남녀가 함께 글을 배우고 무예와 음률(音律)까지 배웠다는 예는 신라의 화랑도에 있어서 여인도 화랑들의 접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머니가 성인으로서 만민의 모범의 대상도 되었다. 소서노가 온조왕의 어머니 뿐 아니라 만민의 어머니, 즉 국모로서 그 묘당이 세워지고 추대되었다는 것은 여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확고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풍조는 여인은 순결, 남자는 충성 등을 위주로 했던 유도정치 시대와는 큰 차이를 나타내고있다.

즉, 삼국시대는 지혜를 더욱 존중하는 시대로서 정치적으로도 남녀의 차별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남녀의 생리적인 차이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체력이나 힘이 강한 까닭에 대외관계에 있어서 장정들을 통솔하는 병사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남성이 여성보다는 당연히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가사와 농경에 있어서는 여인들도 남자 못지않은 슬기와 지혜를 발휘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어머니들이 자식의 교육이나 농경생활의 전반에서 그 섬세함과 창의성으로 많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 소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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