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 당시 책을 인쇄하던 ‘홍주간행소’최초 언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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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목 당시 책을 인쇄하던 ‘홍주간행소’최초 언론활동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9.08.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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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신문 지령(紙齡) 600호 발행 특집

홍성지역의 언론 600년을 말하다<1>
1883년 10월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사진 왼쪽>와 1896년 4월 독립협회가 발행한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홍성(洪城)은 서부 충남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해 해방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방언론(地方言論)의 중심지였다. 이같은 연유는 홍성이 조선조(朝鮮朝) 목사(牧使)가 주재하던 홍주목(洪州牧)으로 관아지(官衙地)였고, 지리적 조건이 충서지방(忠西地方)의 교통중심지로 일제치하(日帝治下)때부터 각종 행정관서가 이곳에 몰려있어 해방이후에도 계속해 정보 산출의 근원지가 돼 왔기 때문이다.

최근 매스미디어시대 이전인 홍주목(공민왕 7년인 1359년~공민왕 20년인 1372년 목으로 승격) 당시 이곳 홍성에는 관(官)에서 책을 인쇄하던 ‘홍주간행소(洪州刊行所)’가 설치돼 그 당시 이미 출판의 중심지 역할을 맡기도 했다. 홍성지역 최초의 언론활동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홍주목 당시 ‘홍주간행소’의 출판시작으로부터 최소 600여 년의 세월이 넘었다. 또한 넓은 의미로 언론을 말한다면, 공적인 개인의 연설, 편지, 기타 팸플릿을 모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민비(閔妃)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년) 이후 이곳 홍성에서는 의병(義兵)의 진원지로 왕(王)에 대한 많은 유림(儒林)들의 상소가 잇달아 올려졌다. 그중에서도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와 이설(李偰)의 ‘토적소(討賊疏)’는 당시 고종(高宗) 임금에게 시국상황을 대변했던 공적(公的) 언론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리며 시시비비를 논하는 언론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공표방법과 전달수단이 다를 뿐 한 시대의 사건을 비춰주는 거울인 것만은 다르지 않다.

매체(媒體)를 중심으로 논할 수 있는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매우 짧다. 근대적 신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10월, 당시 조정(朝庭)에서 주관해 발행했던 ‘한성순보(漢城旬報)’였고 뒤이어 ‘한성주보(漢城週報)’가 발행됐으나 두 신문 모두 궁정인(宮庭人)의 전유물이었을 뿐이다. 이후 서민들이 볼 수 있었던 신문은 1896년 4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발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이 그 효시였다.

세상소식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을 위해 드디어 조선 최초로 신문이 발행됐던 것이다. 바로 1883년 10월 31일 열흘에 한 번 나오는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됐는데, 이는 최초의 근대신문이며, 관보였다. 개화파는 국민계몽과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일본의 협조 하에 근대신문 발행을 도모했고, 1883년 1월 한성부에 신문국을 설치하고 창간을 준비했으나 보수세력의 반발로 중지됐다. 같은 해 8월 박문국이 설치되면서 창간 작업의 주체는 온건개화파로 바뀌었으며, 1883년 10월 ‘한성순보’가 창간됐다. 10일에 1번씩 발행했으며, 크기는 국배판과 비슷했고 순한문을 사용했다. 관보적 성격의 내용이 우선이었으며 개화사상 고취를 위한 내용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반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성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다. 독자층은 중앙·지방의 관리들과 한문 해독이 가능한 양반계층에 한정됐다. 경영난 속에 40호 이상을 발행하다가 갑신정변 때 화재로 박문국 건물이 소실됨으로써 창간 14개월 만에 폐간됐다.

이후 민간인이 창간해 구독료와 광고료 수입으로 신문을 운영한 것은 ‘독립신문(獨立新聞)’이 최초였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에 의해 창간돼 1899년 12월 4일에 폐간된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기록된다. 지금도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당시 정부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해 생활을 보장하는 한편 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신문사 설립자금으로 3000원과 개인 생계와 가옥임대비 명목으로 1400원을 별도로 지급해 ‘독립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경비로 모두 4400원을 지급했다. 서재필에게 자금을 지원하도록 주선한 것은 내부대신 유길준이었는데, 그는 신문을 개화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인식했던 사람이다. 또한 정부가 자금을 댄 이유는 신문을 발간해 국민을 계몽하겠다는 목적과 함께 일본인들이 발행하고 있던 ‘한성신보(漢城新報)’에 대항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독립신문’은 창간 당시에는 격일간으로 주 3회(화·목·토요일) 발행됐다. 체제는 가로 22㎝, 세로 33㎝ 판형에 전체 4면으로 이뤄졌는데, 1면 머리에는 논설을 싣고 이어서 관보·잡보·외국통신을 2면과 3면의 일부에까지 실었으며, 3면에는 대부분 광고를 실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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