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홍성에 첫 동아일보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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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홍성에 첫 동아일보지국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9.08.1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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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신문 지령(紙齡) 600호 발행 특집

홍성지역의 언론 600년을 말하다<2>
홍성제일감리교회.

‘독립신문’이 발행된 이후부터 시작되는 우리나라 민족지의 역사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항일운동으로 일관한다.

3·1독립운동이후 민족지인 조선일보(朝鮮日報; 1920년 3월 5일 창간), 동아일보(東亞日報;1920년 4월 1일 창간) 양대지가 발행되면서 1923년 홍성(洪城)에 처음으로 동아일보지국이 생겼다. 초대 지국장에는 윤식(尹埴)이 맡았고 다음 1925년 12월 손재학(孫在學)이 2대 지국장을 이었다. 그 뒤 해방을 맞을 때까지 동아일보지국장은 이용세(李容世·1929.6), 조기형(趙奇衡·1930.11), 윤영(尹瑛·1930.12), 김구한(金龜漢·1934.10) 등으로 이어져 천순봉(千舜鳳)이 해방되던 해 지국장으로 해방 후 1949년 11월 조동뇌(趙東雷)에게 지국을 넘겼다.

조선일보는 6·25한국전쟁 때 사보(社報) 소실로 해방이전 지국장 명단이 모두 밝혀지진 못하고 있으나 초대 홍성(洪城)지국장은 홍성읍(洪城邑)에서 시계포를 경영하던 김흥수(金興洙)가 맡았다. 다음 2대가 구항면(龜項面) 출신인 김연진(金淵鎭), 3대가 결성면(結城面) 출신인 박원식(朴元植) 등으로 이들은 당시 동아일보지국장들과 함께 사회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벌여왔다.

동아일보 2대 지국장인 손재학(孫在學)은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홍성(洪城)에서 뜻이 맞는 동료끼리 무공회(無空會)라는 사회단체를 조직하고, 항일사상을 계도해 갔는데, 당시 일본(日本)경찰의 사찰이 심해 동아일보지국을 맡고 언론 속에 숨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日本)경찰에 의한 언론인 탄압은 겉으로나마 유연성을 보였기 때문에 신문지국은 호신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신문독자는 주로 사회운동을 함께 하는 회원들이었다. 그래서 당시 지국장들은 본사에 보내는 신문구독료로 논(畓)을 팔아 보내기 일쑤였다. 조선일보 초대지국장 김흥수(金興洙)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와 함께 경영해오던 읍내 시계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신문지국에 쏠려 돌아다니다가 본사에 낼 구독료는 시계수선비 등을 받아 축냄으로써 부자간 불화를 빚기도 했다.

조선일보 2대 지국장 김연진(金淵鎭)은 그 당시 서울에서 화요회(火曜會)에 가입, 활동케 하자고 권유했다. 손재학(孫在學)은 계속 무공회(無空會)를 떠밀고 나갈 뜻을 비쳐 김연진(金淵鎭)이 고향에 남기로 했다. 그래서 김연진(金淵鎭)은 조선일보지국을 맡은 것이다.

조선일보 3대 지국장은 박원식(朴元植)으로 이는 대동단(大同團)사건을 일으킨 대동단(大同團) 단원이었다. 당시 대동단사건(大同團事件)은 궁중에 있는 이강(李岡) 공(公)을 상해(上海) 임시정부로 모셔가 독립자금조달을 원활하게 하려고 이강(李岡) 공을 납치한 사건인데, 그 주모지휘자가 홍성읍(洪城邑) 옥암리(玉岩里) 출신인 최익환(崔益煥)이었다. 최익환(崔益煥)은 사회운동을 벌이고 있는 당시 언론인들과 친교를 나눴고, 동아일보지국장 손재학(孫在學)은 이런 일본(日本) 경찰의 시비를 다소나마 벗어나 보고자 동료인 김창식(金昌植)을 동아일보기자로 발령하게 해 홍성지국의 기자로 신분증을 갖도록 했다. 이 또한 호신책이었으며 홍성지방에서는 김창식이 첫 번째 기자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이들 지국장과 기자 등은 홍성읍(洪城邑) 서문동(西門洞) 커브길에 지국사무실을 두고 인접 서문동(西門洞) 감리교회를 내왕하면서 청년회 등을 조직 활동했다. 교회를 이용한 활동은 일본경찰이 외형상 종교단체에 대한 탄압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후에 김창식 기자가 요절했을 때 지방언론인은 물론 홍성 지방의 각 사회단체(洪城靑年會, 無空會, 洪城地域勞動組合 等)가 중심이 돼 홍성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사회단체장(社會團體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동아일보 4대 지국장 조기형(趙奇衡)은 그 당시 홍성경찰서(洪城警察署) 고등계 형사였다. 매일 같이 지방언론인들의 동태를 보살피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였다. 그러다보니 조기형(趙寄衡)은 아예 이들 사회운동을 벌이는 지방언론인들과 뒤섞여 버렸다. 조석(朝夕)을 같이하고 회비도 함께 내다보니 조선인(朝鮮人)으로서 사회운동을 벌이는 당시의 항일사상(抗日思想)은 너무도 당연하다는데 감동하고 형사 직을 내놓은 후 동아일보지국장이 된 것이다.

해방이 된 후 정부수립과 함께 이들 홍성의 지방언론인은 정치에 투신했다. 동아일보지국장이던 손재학(孫在學)은 초대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을 지냈고, 조선일보지국장 김연진(金淵鎭), 박원식(朴元植) 등도 2대 국회의원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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