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과 신문지국장 주도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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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과 신문지국장 주도의 언론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9.08.2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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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신문 지령(紙齡) 600호 발행 특집

홍성지역의 언론 600년을 말하다<3>

해방 이후 대한민국(大韓民國)정부가 수립되고, 6·25한국전쟁을 치르기까지에는 홍성(洪城) 지방 언론풍토가 해방이전 지국장들의 생태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신문보급에 의한 수입원을 따지기 보다는 지방정가(地方政街) 형성에 신문이 활용됐다. 동아일보는 해방이후 조동뇌(趙東雷), 유승준(俞昇濬), 이인상(李寅相) 등이 이어나갔고 조선일보도 동아일보지국장을 지내왔던 조동뇌(趙東雷) 등이 이어갔다. 1955년 당시 지국장을 맡았던 유승준은 2대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에서 활동했고, 그 이후에도 4·19의거 직전까지 두 번째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가에 나간 표본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도 이렇게 지방정치는 지방언론인이, 또 언론에 종사하면 정치에 참여해야한다는 불문율 같은 흐름이 지속됐다. 하지만 그 뒤에는 동아일보의 이인상(李寅相), 서울신문의 김억규(金億圭)지국장 등에 의해서 그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들 이인상(李寅相)·김억규(金億圭) 등은 신문구독료를 받아내 본사에 매월 지대를 지불했고, 신문에서 얻는 많지 않은 수입원이 생활에 보태어 사용한 첫 사례가 됐다. 그 당시 김억규는 부부가 손수 신문을 배달도 하고, 구독료를 받으러 다니기도 해 지방에서는 어린 소년들도 신문지국장을 기억할 정도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완벽하리만치 구독료를 받아내 그가 신문지국을 내놓을 때에 단 1푼의 밀린 구독료가 없었다는 기막힌 사례를 남겨놓은 지국장이다.

휴전 이후 사회 안정과 함께 중앙에서 새로 발행되는 신문은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 중앙지 이외에도 민국일보(民國日報), 연합신문(聯合新聞), 평화신문(平和新聞) 등 새로운 중앙지가 속속 발행됐고, 대전(大田) 지방에서도 대전일보(大田日報)와 중도일보(中都日報) 등 지방지가 발행됐다.

늘어난 신문만큼 지국장도 그 수효가 크게 늘어났고, 일부 신문에서는 지국장이 추천한 기자도 발령을 내줘 홍성(洪城) 지방의 언론계가 종사자의 수나 활동의 범주로 보아 만화경(萬花境)에 이르렀던 시기였다는 평가다. 이런 상황은 다른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힘을 과시하고 단체성을 갖기 위해 언론인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각 신문 6면 충남판에 홍성발기사를 보내던 1965년 홍성주재기자와 지국장들.


1954년 4월, 홍성에도 장항선기자연맹홍성군지부(長項線記者聯盟洪城郡支部)가 조직됐다. 지부장에는 대전일보(大田日報) 지국장인 조관호(趙琯鎬)가 선임됐다. 이 때 만들어진 기자단(記者團)은 양상을 바꾸어 홍성지방만 모임을 만들어 홍성군내 언론 종사자가 참여했다. 홍성군기자단(洪城郡記者團) 초대단장에는 경향신문(京鄕新聞) 지국장 신경희(申景熙)가 선임됐고, 당시 경향신문이 야당지였기에 기자단도 야적(野的) 성격이 강했다. 이어 기자단장으로 서울신문 지국장인 주인노(朱寅魯)가 선임됐고, 그 이후 신문성격대로 당시의 기자단은 여적(與的)기질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 당시 기자단 부서로는 총무부, 조사부, 취재부, 감찰부 등을 두어 단원끼리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책무를 나눠 맡았다. 이렇게 조직화됐기 때문에 그 활동도 왕성했다. 이들 단체를 이끌어가는 단장(團長)의 역할도 막중하다는 점에서 당시 기자단장 선거전은 치열했다. 또 사회 각 기관이나 공공단체에서도 이 같은 기자단 활동에 관심을 갖고 접촉했기 때문에 당시의 기자단 활동은 언론횡포라고 할 과잉취재도 없지 않았다. 이 무렵 홍성지방과는 달리 육군(陸軍) 제2훈련소가 자리 잡은 논산(論山) 등지에는 속칭 기자라는 사람만 200명이 넘었다는 것이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이런 지방언론계의 정화작업이 진행됐다. 각 지역마다 사이비기자를 색출해냈다. 당시 논산에서는 사이비기자만 두 트럭에 실려 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여기서 특기해야할 일이 홍성지방의 언론이다. 인근 각 지역이 모두 정화소용돌이에 몰릴 때 이곳 홍성지방에서는 단 한 명도 정화대상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만큼 홍성의 당시 지국장들이 수준급이었고 경제적 수단으로 신문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했다. 이런 언론풍토는 그 이후 홍성지방이 충남도내 서부지역 언론중심지 역할을 해내는데 밑거름이 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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