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성실함, 올곧음으로 프로게이머 꿈 이룬 박민호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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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와 성실함, 올곧음으로 프로게이머 꿈 이룬 박민호 군
  • 한기원·윤신영 기자
  • 승인 2019.10.0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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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오버워치 리그’ 우승 샌프란시스코 쇼크팀 주전 딜러
2019년 ‘오버워치 월드컵’ 한국팀 대표 최종 7인 로스터 선정

20년 전만해도 컴퓨터 게임은 아이들의 놀이일 뿐이었다. 이후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임‘스타크래프트’를 통해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기고, 게임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고액의 대회상금과 억대 연봉을 받으며 게임을 하는 ‘프로게이머’들은 게임에 대한 인식까지 바꿨다.

지난 8월 청로회 이철이 대표(애칭 ‘철이 삼촌’)에게서 “어리지만 대단한 친구가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이 대표는 “청로회 청소년 쉼터에서 지냈던 친구가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프로게이머에 도전했는데 지금은 정말 대단한 프로게이머가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처음 슈팅 게임 ‘오버워치’ 프로게이머 박민호(20·광천읍) 선수에 대해 알게 됐다. 그렇지만 그당시 박 선수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고 한창 리그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박 선수의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 선수가 지난달 30일 ‘오버워치’ 대회 중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대회인 ‘오버워치 리그’에서 최종 우승을 하고 국내로 잠시 귀국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박 선수를 만나게 됐다.

 

Q. 본인에 대해 소개해 달라.

A. 온라인 슈팅게임 ‘오버워치’의 프로게이머이고 이름은 박민호, 아이디는 Architect이다. 한국나이 20살이고 샌프란시스코 쇼크 팀 소속이다. 고향은 잘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중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곳이 홍성군이다. 초등학교는 여러 곳을 옮겨 다녔고 공주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성중학교을 졸업했다. 그리고 홍주고등학교를 1학기 다니고 자퇴했다.

 

Q. 컴퓨터 게임은 어떻게 접하게 됐나.

A. 컴퓨터 게임을 어떤 식으로 접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가정사로 할머니와 고모 손에 자랐는데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동영상보는 것을 좋아한다던데, 나는 형이 게임하는 것을 보며 세 살 때부터 컴퓨터에 흥미를 느꼈고 네 살엔 게임에 재미를 느꼈다. 특히 형이 게임하는 것을 보며 옆에서 같이 게임했던 것이 기억난다. FPS 게임은 서든어택으로 입문했다. 그 후 스타크래프트를 했고 그다음 리그오브레전드를 했다.

 

Q. ‘오버워치’는 어떻게 접하게 됐나.

A. 오버워치는 다른 친구들 보다 조금 늦게 접했다. 그 이유는 리그오브레전드를 좋아해서 가장 친한 친구와 이 게임만 계속 하자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절에도 프로게이머 생각은 있었으나 실력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즐긴 것이다. 오버워치는 다른 친구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 친구가 잠깐 해보라며 자리를 비워줘서 해본 것이 처음이다. 그런데 재밌어서 시작하게 됐다. 웃긴 것은 리그오브레전드만 하자던 가장 친했던 친구와 같이 오버워치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샷건을 쓰는 ‘리퍼’라는 영웅을 사용했다.

 

Q. 프로게이머를 어떻게 본격적으로 꿈꾸게 됐나.

A. 원래 집이 광천읍 끝자락이었다. 학교에서 멀기도 했고 가정사가 있어서 청로회 ‘철이 삼촌’의 청소년 단기쉼터에서 지냈다. 이 때 재능이 있다고 느끼게 됐다. 당시에 팀으로 하는 게임성적이 낮았다. 왜 난 성적이 높지 않을까 고민하다 주로 쓰는 영웅을 바꾸고 팀이 아니라 혼자 게임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영웅을 77시간이나 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 다음 시즌에 프로들이 있는 리그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프로들을 상대편으로 만나 이기기도 하고 같이 게임하기도 하면서 내가 오버워치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을 했다.

 

Q. 고등학교 중퇴에 대한 결심을 한 이후 주변 분들을 어떻게 설득했나.

A. 아버지와 철이 삼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들어가는 평범한 삶을 생각하고 계셨다. 가장 큰 지원은 형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를 항상 봐왔고 항상 같이 게임했던 형이 내 재능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러한 부분을 형이 대변해 줬다. 당시 류제홍 선수라는 ‘오버워치’ 프로게이머를 온라인상으로 알고 지냈는데 상담을 했지만 류 선수는 자퇴에 반대했다. 그 다음에 일을 진행한 이후 류 선수에게 자퇴한 사실을 그냥 말했다.

 

Q. 중퇴이후 서울로 올라간 것으로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다.

A. 당시엔 시즌 진행 중이라 선수 스카우트 기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분간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프로를 바로 노리기보다는 프로 지향 팀으로 목표를 정했다. 첫 테스트를 긴장해서 떨어졌다. 난 실패를 해도 그것을 계속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계속 한다. 그래서 정신을 추스르고 다른 곳을 알아보고 ‘BigShoT’에 테스트를 봐서 들어갔다. 오버워치는 1부 리그, 첼린저스(2부) 리그가 있고 그 아래 프로 지향 팀이 2000팀 가량 있었다. 프로지향팀은 오픈 디비전을 거쳐 올라가게 된다. 우리 팀은 계속 이겨서 최종 각 4팀으로 나눈 그룹이 리그 식으로 겨뤄서 각 그룹 1등만 첼린저스 리그로 올라가 겨루는 위치까지 올라갔다. 첼린저스(2부) 리그에 우여곡절 끝에 진출했다. 어렵게 진출했지만 우리 팀은 실력의 벽을 만났고 떨어졌다. 당시가 2017년이다.

 

Q. 첼린저스(2부) 리그에서 떨어진 이후엔 어떻게 됐나.

A. 그해 겨울 ‘MVP’라는 1부리그 팀에서 테스트를 했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밤 11시에 1부 리그 팀 ‘CONBOX’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일주일 동안 ‘BigShoT’ 멤버와 고민하다 ‘CONBOX’로 갔다. 그래서 MVP에도 사정을 말했는데 자신들의 팀에도 테스트 합격이 거의 확정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난 이미 ‘CONBOX’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CONBOX로 스카우트되면서 아이디도 Architect로 바꿨다. 특히 ‘CONBOX’ 팀원으로 뽑힌 이유가 있었다. 이전에 게임을 하다가 ‘CONBOX’의 Asher(최준성 선수)를 만나 게임했었다. 나의 좋은 모습을 팀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팀에 특정 영웅을 잘하는 선수가 필요했는데 그 조건에 내가 맞았던 것이다.

사진출처= 샌프란시스코 쇼크.

Q. ‘CONBOX’에서는 어떻게 됐나.

A. TV에 나왔는데 그게 OGN(온게임넷) 주관 경기였다. 첫 경기에 긴장이 풀리지 않아 청심환을 먹었는데 소용없었다. 긴장으로 첫 경기는 못했지만 이후에 좋은 경기를 많이 보여줬다. 16팀 중 8강을 획득했다. APEX 대회 ‘CONBOX’에서 시즌 3~시즌 4까지 있었는데 도중 해외에서 ‘오버워치 리그’가 생겼다. 이때 잘하는 선수들이 ‘오버워치 리그’로 많이 빠져나갔다. ‘CONBOX’도 ‘오버워치 리그’로 기존 멤버가 빠져나갔고 새 팀원과 팀워크가 맞지 않아 실력이 많이 떨어져서 운으로 8강을 유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CONBOX’는 열악했다. 에어컨이 없고 컴퓨터 7대가 돌고 있는 곳에 선풍기 3대로 버텼다. 당시 ‘CONBOX’는 와해 수준이었다. 나는 당시 ‘오버워치 리그’ 팀에 테스트를 봤었다. ‘오버워치 리그’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 팀에서 3주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큰 가방 네 개를 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큰 가방 여러 개를 메고 온 나를 보고 할머니가 많이 마음 아파하셨다.

 

Q.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엔 어떻게 됐나.

A. 당시엔 개인 방송을 하며 지냈다. 프로 생활을 하며 너무 힘들게 지냈기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다. 당시 꾸준히 1부 리그 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5개 팀 정도 됐다. 가고 싶던 팀도 거절했다. 마음이 생기면 연락드리겠다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이 때 내 장비가 안 좋은 것을 안타까워하던 한 팬 분이 자신이 쓰지 않는다며 컴퓨터 장비를 보내주셨다. 또 별도로 장비를 살 수 있도록 후원도 해주셨다. 그렇게 쉬면서 방송을 하던 중에 “프로게이머가 1년 쉬면 끝이다”라는 말이 생각이 났고 그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연락해왔던 ‘X6-Gaming’에 들어갔다. 12월에 합류했는데 당시엔 국내 리그에 경기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 대회에 나갔고 우승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손목 부상으로 다른 선수가 경기했다. 그리고 MBC 컨덴더스 리그가 3월에 시작했는데 그 때 현 소속팀인 ‘샌프란시스코 쇼크’에서 연락이 왔다. 중국 대회 경기를 본 듯 했다. 나는 가장 조건이 좋은 팀으로 가고 싶었고 내 값어치를 알아주는 팀에 가고 싶었다.

 

Q. 샌프란시스코 쇼크는 외국인데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A. 경기력에서 고비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쇼크에는 2018년 3월에 합류했다. 바로 첫 경기에 출전했는데 좋아하고 존경하던 선수와 하다 보니 긴장을 많이 해서 경기를 망쳐 버렸다. 팀이 많이 당황했다. 잘하는 선수라고 데려왔는데 못해서 놀란 것이다. 코치에게 자신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다음 경기에 환상적인 경기력을 뽐내 팬들에게 나를 인식시켰다. 경기가 재미있었다. 그런데 당시 팀원들 중에 나만 한국인이었다. 게임 내에서의 소통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 혼자 숙소에 있을 땐 나가지도 못했다. 코치 한분이 미국 시민권자인 한국인이었는데 유일하게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팀에서 영어공부도 시켜줬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중에 오버워치의 실용적인 영어를 가르쳐주는 분을 만나고 게임 내에서의 소통을 해결하게 됐다.

 

Q. 2019년 ‘오버워치 월드컵’ 국가대표에 꼽혔다.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A. ‘오버워치 리그’ 2시즌 때 1스테이지를 뛰고 팀 전략으로 바뀌어서 2~3스테이지(6~7개월)를 벤치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국가대표 12명에 뽑혔다. 당시 국가대표 선발 방송에 있던 사람들 수천 명 중 절반가량이 내가 뽑히자 일제히 ‘?’를 치던 것이 생각난다. 힘들었는데 그래도 게임 연습을 놓치지 않았고 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스테이지 4가 시작하고 그때부터 다시 활약했다. 팀 전략이 내가 활약할 수 있는 전략으로 바뀐 덕이다. 이때 마음가짐은 경기 한 번 한 번이 모두 내 평가전이라는 느낌으로 경기에 임했다. 팬과 소통 중에 “신경 쓰지 말고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말했던 팬들의 응원들이 비난들을 모두 잊게 만들었다. ‘BigShoT’부터 응원해 오던 팬도 있다. 이런 기억들이 내가 팬들을 항상 사랑하게 만든다.

 

Q.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은 흔치 않은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어린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A. 그 친구들이 내게 질문을 하면 답을 해줄 수는 있겠지만 난 아직 20살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배울 것이 많아 그 친구들에게 방향을 가르쳐주기엔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난 하고 싶은 일을 일단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운 좋게도 하고 싶은 일과 재능이 겹쳤을 뿐이다. 자신이 하고 싶다고 무조건 하는 것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자신이 재능 있는 것을 했으면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재능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다보면 그 일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게임도 이기면 그 게임이 좋아진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A. 항상 가족에게 감사한다. 우선 할머니께 감사한다. 집에 있으면 항상 챙겨주신다. 또 아버지께도 감사하다. 그 자리에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항상 어떻게든 챙겨주기 위해 노력하셨다. 또 형에게도 감사한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나를 데리러 와주고 어릴 때부터 항상 날 챙겨줬다.

긴 시간 박 선수의 삶을 들으며 긴장해서 실패해도 또다시 도전해 이겨내는 용기, 준비한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내는 성실함,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은 올곧음을 알 수 있었다. 박 선수는 순탄치 않은 삶 속에서도 2019년 우리나라 대표 선수 최종 7인에 뽑히며 동시에 ‘오버워치 리그’ 그랜드 파이널 우승를 했다. 박 선수 개인적으로 최고의 해다. “세계 전력이 평준화 되서 힘들지만 우리가 ‘2019 오버워치 월드컵’에서 또 우승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20살의 박민호 선수에게 더욱 밝은 미래가 함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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