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홍언니' 가 있었다. 이름이 '순홍' 이 였는데, 경자가 살던 동네의 언니다. 경자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담임을 맡던 때 그 학급에 있던 여자 아이다. 벌써 30년 가까이 된 이야기이니까 옛날 옛날이야기다. 순홍언니가 문득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은, 가고 없는 옛날이 그립다기 보다 그 때 가졌던 순수와 순정이 그립기 때문이다.
경자가 며칠간 집을 나갔다 온 후로 거의 매일 내 책상위에 꽃을 가져다 놓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보다가 '순홍언니' 가 보낸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교에 정을 붙이려는 '경자' 나름의 노력인 줄 알았다. 그래도 그렇지 꽃을 사러 읍내까지 가는 것도 그렇고, 학생이 그렇게 쓸 돈이 어디 있겠나 싶어 말렸더니, 이제는 책을 빌려 달랜다. 책?! 의아했지만 가지고 있는 그림책 중에 경자가 볼만한 걸로 주다기 나중에는 있는 것 다 주어도 모자랄 만큼 빌려가는 횟수가 잦아졌다. 돌려줄 때는 온갖 정성을 다 하였고 책갈피 하나씩을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니?"
"동네 언닌데요, 선생님이 좋대요?" 미자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나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다니? '섬마을 선생' 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여서 귓등으로 들었는데 이제는 아예 두꺼운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싫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대나.
나는 파인의 이 시가 그리도 뜨겁고 절절한 연애시인 줄을 몰랐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고 안타깝고 뜨거운 사연을 경자를 통해 보내왔다. 도대체 나의 무엇을 좋아한단 말인가? 한번 만나나 봐야겠다. 그리고 말하리라. 나는 지금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을.
비가 오는 토요일 오후였고 그녀는 개나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수척해 보이도록 긴 목을 가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당신의 마음을 알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노라고, 말해야 한다고, 나는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 나이 스물일곱, 나는 그렇게 내 청춘을 어두움 속에 가두고 있었다.
"경자가 선생님 얘기 매일 같이 해요. 밤마다 그림 그리셔서 눈이 항상 빨갛다고. 할머니에 장애 있는 엄마 아버지, 그리고 가난한 집에 동생 여럿은 중학교 1학년짜리 경자가 견디기 힘든 현실일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이 잘해주셔서 좋대요. 기회가 되면 선생님 그림 꼭 한번 실제로 보고 싶어요. 까치와 놀고 있는 소녀 그림, 그거요. 그리고 저는 남해에 있는 오빠 집에 가 있기로 했어요. 바다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그녀는 총총히 떠났다. 더 이상 편지도 꽃도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본다. 내 마음의 창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내 눈이 빨갛게 충혈된 것을 아름답게 본 것도, 이미 잊고 있던 내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도 모두가 경자와 그녀의 순정한 마음 빚어낸 나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경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고 좋아하는 그림을 보고 싶은 것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도 바다를 보고 있을까?
홍주신문 제83호(2009년 7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