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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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사 가는 길
  • 전만성(화가, 갈산고등학교 교사)
  • 승인 2009.08.1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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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 보덕사 가는 길(수채화, 30X25)


덕산에서 가야산 가는 길은 참으로 한가롭고 호젓하다. 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삶 바깥쪽의 여유와 유장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계절을 따라 꽃들이 줄이어 피어나고, 길가 텃밭에는 가지며 오이, 고추 등이 조롱조롱 매달려, 그 누군가가 땀흘린 삶의 작은 결실인 것만 같아 대견하다. 

그 중 제일경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저수지의 물비늘이다. 그 반짝임의 오묘한 리듬을 보고 있노라면 천상의 속삭임이 저럴까 싶다. 겨울날 아침나절, 먹이 사냥을 나온 천둥오리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얼음장을 밟고서 햇빛 마중을 하는 그것들의 모습은 한 편의 서사시다. 뒤따라오는 이도, 앞서가는 이도 없이 아스팔트길을 미끄러지듯 자동차로 유유히 달리는 기분도 유별하다. 벼밭에선 더위가 수증기처럼 피어오르고 길가에 늘어선 목백일홍은 그 탐스런 꽃숭어리들을 촌색시처럼 수줍고도 곱게 흔들어 맞아준다. 

주차장은 넓고 한적해 오랜만에 깊은 숨을 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주차장에 머물지 않는다. 보덕사엘 가려면 주차장 맞은편 사잇길을 택해야 한다. 보덕사라고 쓴 작은 푯말을 지나면 시멘트 냄새가 생생할 것 같은 새로 지은 좁은 다리가 나타나고, 다리를 지나면서 낮고 그늘진 경사길을 따라 오르게 된다. 그 길을 오르다 보았던 비구니 스님의 속기 없는 뒷모습은 한편의 점경인물화로 새겨져 있다. 

그 길 끝에서 '보덕사'와 '관음암' 두 갈래로 갈라진다. '관음암'으로 오르는 길은 자잘한 야생화가 피어있고, 보덕사로 가는 길에는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보덕사부터 들르기로 한다. 먼저 해후소를 만나게 된다. '해후'의 의미가 재미있다가도 아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그것을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해후소 옆에 고염나무 그리고 기왓장을 쌓아 만든 굴뚝 두 개. 스님 한 분이 굴뚝 잔불을 끄고 성급히 돌아선다. 그러고 보니 오늘 따라 절집마당이 분주하다. 장마 뒤 해날을 잡아 청소를 하는 모양이다. 둘이서 빨래를 비틀어 짜고, 마주 들고 빨래를 나르고, 징겅징겅 빨래를 밟고 하는 모습들이 이야기 속처럼 현실감 없이 지나간다. "빨래를 헹굴 적에는 넓은 그릇이 좋다." "아이다. 깊은 게 더 낫다." 의견이 분분한 속에 "피존 이리 도"하는 경상도 억양의 목소리가 도드라진다. 절집마당에서 듣는 속세 말이 귀에 걸리어 되돌아 보니 '아! 스님들도 사람으로서의 생활은 해야하는 구나' 싶다. 아주 당연한 사실인데도 무슨 깨달음 같이 대견한 것은 어인 일인가? 

'보덕사 석등' 앞에 이렇게 적혀 있다. 보덕사 석등은 대원군이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옮겨오기 위해 불태운 절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뜻을 이룬 대원군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의 보덕사를 새로 짖고 기도를 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이 보덕사는 대원군의 '야심'에 의해 희생된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으려는 알량한 속죄의 결과? 그렇게 읽힌다. 

석등을 보고 삼층탑을 지나면 오래된 나무들이 즐비해 먼 옛날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나무들과 일일이 대화를 할 만큼의 여유는 없다. '정진중입니다'하는 푯말 때문이다. 그 속에는 넘어오지 말라는 뜻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푯말을 살짝 비켜 부도밭까지 들어가곤 한다. 거기서만이 그 절의 역사성과 세월의 두께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도밭 앞에서 보는 산은 깊고도 편안하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의연하고도 온화하게 서 있다. 산이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아! 청산!하고 소리내어 본다. 말이 없는 청산의 그 외로움과 비의가 내 가슴속에도 퍼진다. 

청산과의 대면도 잠깐. 남의 집 담장을 넘은 주제라 떳떳할 리 없어 얼른 뒤돌아 나온다. 앞마당에 나와야 그제서야 마음이 펴져 마당가에 핀 꽃이며 꽃밭의 꾸밈새를 찬찬히 본다. 봉숭아, 백일홍이 한창이다. 흰나비 한 마리가 너풀너풀 춤을 추며 이 꽃 저 꽃을 기웃거린다. 

삼층 돌탑아래 함초롬 피어있는 색색의 채송화 무리. 부처님께 바치는 비구니 스님의 소박하고 순정한 마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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