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 인생 60년, 이태휴 대장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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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 인생 60년, 이태휴 대장장이
  • 이은주 기자
  • 승인 2009.08.18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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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쩡 쩌엉, 따앙 땅~”

 쇠붙이를 두드리는 망치질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 가보니 대장간(장곡면 가송리)이 있었다. 대장간 안으로 들어서니 화덕에서는 시뻘건 갈탄이 금방이라도 쇠를 녹여버릴 듯 타고 있다. 한쪽이 움푹 패인 모룻돌에 벌겋게 달군 갈고리를 얹어놓고 망치질을 하고 있는 대장장이 이태휴 씨(71·사진)를 만나 그의 60년 외길인생에 대해 들어보았다.

"무더운 여름철 1000도가 넘는 화구의 뜨거운 열기에 어려움도 많지만 쇠의 성질과 특성에 맞춰 정성들여 담금질과 모룻돌에서의 망치질로 연장 하나하나를 만들다보면 나름대로 보람을 느낍니다."

연중 365일 제대로 쉴 겨를이 없어 몸은 점점 축이 나고 수십차례 담금질에 단련된 것은 쇠붙이 뿐만이 아니다. 이 씨 양 손바닥은 수 많은 메질 덕분에 굳은살 투성이다.


'3대 대장간'은 조부 이하수 옹과 부친 이병운 옹, 그리고 현재 대장간을 운영해오고 있는 이태휴 씨까지 3대째 걸쳐 가업을 승계해 오고 있는 곳이다. 이 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어 기피하는 대장장이의 길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3대에 걸쳐 대장간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오직 60여년간을 하루같이 대장장의 외길로 살아오고 있다. 쌓여있는 쇳덩이와 쇳조각들,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커다란 모룻돌, 화덕에서 발갛게 갈탄이 타고 있고, 그 위에서 달궈진 갈고리를 망치질하여 1분도 채 안돼 마술처럼 호미가 완성되는 모습이 오래 전 시골 장터에서나 보던 대장간 풍경 그대로다. 그동안 하도 망치질과 메질을 해서 그런지 모룻돌 한쪽이 움푹 들어갈 만큼 닳아있다.

"왜정 때 일본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선생님이 저를 무척이나 이뻐해 주셨어요. 그런데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어려운 시절이라 학교 공부보다 기술을 가르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 방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대장장이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왜정 때 가난한 가정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씨는 어릴 적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이 제일 무서웠다고 한다. "제 나이 11살 때, 흰 쌀밥은 커녕 보리밥 조차도 먹기 힘든 시절에 부친에게 혹독하게 매맞아가며 배웠습니다. 처음 한 일이 풀무질이었는데,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고 맞기도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낫을 열 댓가락 만들어 아버님께 검사를 맡으면 아버님이 잘못된 낫은 다 부숴버리고 대여섯가락만 합격시켜 주셨죠. 그러면 동생들과 함께 낫을 짊어지고 홍성, 광시 등지를 돌아다니며 낫을 판 돈으로 수수쌀을 사다 먹었습니다."

이 씨의 나이 33세 되던 해, 부친이 돌아가시고 장남인 탓에 대장간 일을 하며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이 씨의 뒷바라지 덕에 동생들은 지금 현재 대학교수, 사업가 등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저희 형제 중에서 대장장이가 셋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대천 어항에서 대장간을 하고 있고 바로 밑에 동생은 대장장이로 살다가 안타깝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낫, 호미, 식칼, 쇠스랑, 왜이낫, 곡괭이, 조새(굴따는 기구)고마대 등 이 씨가 만드는 것은 쇠붙이로 된 농기구와 어구 일체다. 대장간이 자리한 곳이 바닷가(대천, 안면도) 근처이다 보니 특히 이곳에서는 호미 주문이 많다.

"지금 주문량으로 보면 하루에 호미를 400~500개 정도 만들어내야 되는데 이제 힘에 부쳐50개 정도 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요즘엔 중국산도 많이 들어오는데 바닷가 아낙들이 제가 만든 호미만 집어간다더군요. 바지락을 캘 때 중국산 호미보다 제가 만든 호미가 짱짱해서 중국산 호미로 한됫박 캐면, 제 호미로는 한바가지를 캐낸답니다."

한때는 광천지역에 안면도 인근 여러 섬에서 배가 드나들어 농기구 판매가 타 지역보다 활발하여 대장간도 무척 바쁘고 수입도 좋은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나이도 들고 농기구도 기계화에 밀려 대장간에서 만드는 종류도 줄어들어 판매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또한, 대장일을 물려 줄 젊은이들이 없어 대장간의 맥이 끊어질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현재 홍성지역에는 3곳(오관리와 광천지역, 그리고 이씨의 대장간)의 대장간에서 화덕을 달구고 있는 실정이어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현실이다.

왜 아직도 대장간을 하시는지에 대해 이 씨는 “배운게 이거밖에 없거든요. 때론 어렵고 힘들지만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자 조상들의 혼과 숨결이 살아 숨쉬는 옛 전통과 맥을 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이 일 때문에 가족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었던게 고맙고 가끔 지겹다는 생각도 들지만 죽기 전 까지는 계속 대장장이의 일을 할 것입니다."

화덕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호미날을 꺼내 모루 위에 올려놓아 수십번 망치질을 한 뒤, 물속에 처박는다. 이렇게 담금질을 거듭하면 날은 더 얇아지지만 더 강해진다. 하루 종일 돌아가는 선풍기도 화덕의 타는 듯한 열기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일흔이라는 나이에도 망치질을 하는 그의 팔에서 젊은이 못지 않은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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