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체인드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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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체인드 멜로디
  • 전만성(화가, 갈산고등학교 교사)
  • 승인 2009.10.1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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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 꽃 연작(유화, 30×25)


70년대에 신인가수를 뽑는 '전국노래자랑'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가수가 되고 싶은 나는 그 프로그램을 흥미진진하게 보곤 했다. 

"어제 노래자랑 봤니? 단발머리 고등학생이 노래 진짜 잘 하더라. '언체인드 멜로디'라는 외국 곡이었는데 심사위원들이 놀래더라니까!"
 
아무데서나 노래 연습을 하는 나를 볼 때마다 장난을 걸어오던 친구가 그날은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아니! 보지 못했는데." 그렇게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물어물했던 것은 우리 집에 TV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다시보기'나 '내려받기'를 할 수 있는 컴퓨터는 꿈도 꾸지 않을 때이고, 음반을 사서 듣고 싶은 노래를 듣는 것도 특별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심사위원들이 놀랬다는 그 여자애와 그 노래가 상상 속에서 부풀어 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오~ 지나'라는 노래가 방송을 탔다. '언체인드 멜로디'를 번안한 노래였는데 얼마나 극적이고 애절한 지 내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아, 나는 그 노래를 평생 부를 애창곡으로 점을 찍었다. 언젠가 내 무대가 주어졌을 때를 그리며 연습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내 노래를 대중 앞에 드러내기에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나이답지 않게 실연의 아픔을 절규하는 노래를 대중이 좋게 보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꼭 한번 무대에 서서 내 노래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컸다.
 
대학 2학년 때 꿈틀거리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음악학도와 미술학도들이 한 건물을 쓰는 인연으로 매년 가을에 조촐한 친교행사를 가졌는데, 그 해에는 음악학도들이 행사를 주관하게 되어 미술학도들은 그저 재미있게 놀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무대에 오르게 되었을 때 제일 염려되는 것은 반주를 맡은 사람들이 내가 부를 곡을 알고 있느냐는 거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신기할 만큼 곡이 흐를수록 반주와 노래가 일체가 되어 내 노래가 힘을 받고 있었다. 반주하는 사람들이 프로였던 것이다. 직업으로 음악생활을 하는 분들이었고 그들은 경험에 의해 노래손님의 어디를 보완하고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있는 힘껏 가지고 있던 욕망을 다 표출하는 것은 참으로 후련하고 흡족한 일이었다. 노래의 클라이맥스에서 나 또한 쾌감의 절정을 맛보고 있었으니까. 꿈꾸던 나의 무대는 그렇게 예측 없이 찾아왔고 음악학도들의 진정어린 감탄을 듣는 것으로 내 오랜 욕망의 일단락을 맺을 수 있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이 우리 국민의 인기를 얻은 것은 90년대 초였다. TV만 틀면 <사랑과 영혼>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삽입곡 '언체인드 멜로디' 예찬했다. 내가 이미 오래 전에 빠져 살았던 노래를 가지고 사람들은 그때서 호들갑을 떨었다. 사람들이 그때서 부르는 '언체인드 멜로디'는 유행을 좇을 뿐 혼이 담겨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싶었다.
 
모처럼 한가해진 주말에 언체인드 멜로디 음반을 걸어 보았다. 왜 그런지 예전처럼 몰입할 수가 없었다. 예전만큼 절절하지도 않고 가슴에 와닿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절정을 느껴야 하는 고음부에서 짜릿하게 기분을 낼 수가 없었다. 

내가 변한 거였다. 목소리도 정서 상태도 젊은 날의 그것들과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불행과 좌절, 절규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분출해야할 욕망이 쌓인 것도 아니었다. 세월의 은혜일까? 늙어가는 걸까?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멜로디는 변함이 없는데 느낌은 사뭇 다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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