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열정의 불꽃을 태우리라"
상태바
"또 다른 열정의 불꽃을 태우리라"
  • 전만수(본지위원장)
  • 승인 2011.01.07 1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만수의 인물프리즘 삶&꿈
정동구(鄭東求)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

정동구(鄭東求)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실에서 가졌다. 4층에 자리한 사무실은 12월 말 오후의 석양과 함께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이 대각선으로 내려다 보여서 아름다움을 연출했고, 아담한 방안은 각종 패로 체육인의 공간임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늦었지만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으로서 역점추진사업은
"유일한 운동선수출신 체육관련 기관장으로 2010년 2월 8일 취임하였습니다. 평생 해오던 일을 계속하게 되어서 대단히 행복합니다. 재단의 설립목적에 맞게 체육 꿈나무를 발굴 육성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 육성이 중요합니다. 바른 지도자의 육성이야말로 체육인재를 키우는 지름길이지요. 선수출신 지도자들의 국제적 감각을 키우기 위해 어학연수와 외국지도자를 초청하여 강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국제 체육기구에 인턴십으로 파견하기도 하지요. 한양대와 한국체육대학의 석박사과정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도자를 육성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내운동부 지도자는 약 5500여명에 달합니다. 이분들의 내실 강화를 위해 직무연수도 빼놓을 수 없는 과업이지요. 그리고 시도 체육회와 체육관련 학교들과의 네트워크을 통한 인재 육성사업 등이 있습니다."

이사장님은 한국체육사의 산 증인이신데, 인생역정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일이라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한국 최초의 금메달을 딴 양정모 선수의 감독으로서의 영광이 아닌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나 자신의 영광도 영광이지만 대한민국의 승리였고, 영광 이었지요. 지금은 올림픽에서 몇 위을 하느냐가 관심으로 그만큼 국력과 더불어 체육수준이 높아졌습니다만, 당시로서는 올림픽 금메달은 국민 모두의 꿈이고 염원이었지요."

코치 겸 감독으로서 어떻게 양정모 선수를 지도하였나요.
"금메달 만들기 4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벤치마킹을 했죠. 당시 레슬링인구가 100명도 안 되는 척박한 토양에서 연습상대가 절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미국으로 현지훈련을 방학을 통해 매년 다녀왔죠. 국제대회에 여러 번 출전하면서 알게 된 국제 체육인들의 도움이 컸지요. 일본의 명치대, 일본체육대학과 미국의 하버드대, 펜실베니아 등 4년간 현지훈련을 지속했지요. 현지 선수들은 해외선수와의 경험에 도움이 되었으니 서로 상부상조한 셈이고요. 경비를 만드는 일 또한 힘든 과제 였습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힘든 일 이었지요. 당시 레슬링은 미국과 소련이 강국이었습니다. 소련은 갈수 없는 금단의 땅이라 연습 할 기회가 없어 아쉬워했는데, 1975년 7월 민스크(구 소련 백러시아의 수도)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3체급에서 결승에 진출 하였습니다. 1년 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죠.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박종규 실장의 도움이 컸습니다. "금메달 만들기 4개년 계획󰡑의 체계적이며 과학적인 선수관리, 즉 과학스포츠의 쾌거였습니다. 선수 출신으로서 현역선수 생활 중에 아쉬웠던 기초체력 단련과 다양한 선수들과의 훈련 경험은 주효했습니다."

당시의 얘기는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최초 올림픽금메달을 쟁취한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얻은 개인적 영광이 있었다면
"더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수로서 그런 영광의 순간을 갖지 못한 한을 제자를 통해 이루었고, 국민적 바람을 성취했다는 것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림픽에서 귀국 후 청와대에서 본부임원과 입상종목 선수, 임원 등이 박대통령으로부터 훈장(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상을 주며 치하 했는데, 양정모 선수의 코치인 나에게 많은 질문을 했죠. 특히 당시 올림픽에서 2등을 한 동독의 선전 이유를 물었지요. "동독의 라이프니치 대학은 금메달 제조소라고 칭할 정도로 집중적으로 체육인재를 육성합니다"라는 취지로 말씀 드렸지요. 한국도 그런 대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평소의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 했지요. 이에 바로 박대통령은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유기춘 장관에게 그 자리에서 전문체육대학 설립을 지시했지요. 결국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체육대학이 탄생하게 되었고 1977년3월17일 첫 입학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저런 연유로 한국체육대학에서 30년을 봉직하고 교수로서 2007년 영광스럽게 정년을 마쳤습니다."

일찍이 한국체육대학 학장을 엮임 하셨는데 그때의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계약직으로 출발해서 10년만인 1988년 9월 17일 최초 교수직선으로 선출하는 선거에서 3대학장에 선출 되었습니다. 당시 호적상 46세 나이에 학교경영을 책임지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문교부에서 인가를 내주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체육대학 학장은 차관급으로 대통령 임명이었는데, 단독추천이고 게다가 나이가 너무 적어 발령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결국 당시 장기옥 차관과 장시간 면담을 하고나서 11월 2일에야 정식으로 학장에 취임하였습니다. 당시 학교분위기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좌고우면 할 수 시간이 없었죠. 경기력 향상과 지도자 양성에 진력하였습니다. 결과인지는 몰라도 북경 아시아경기대회와 1992년 바로셀로나올림픽에서의 12개 금메달 중 8개가 한국체대 졸업생과 재학생이 따냈습니다. 명실 공히 한국체육의 요람으로 우뚝 선 모습 이었지요. 대학의 설립에 일조한 사람으로서 무사히 학장의 임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더없는 영예였지요."

일생을 통해 많은 만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특별한 만남의 인연이 있다면
"내 인생에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성격이 적극적이다 보니 많은 인연을 갖게 되었지요. 그중에서도 중앙대의 임영신 총장님과 민관식 장관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 3때 임영신총장님께서 운동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덕분에 국가 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려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는 토양이 되었지요. 그리고 대한민국의 '쿠베르탱'으로 불리는 민관식 장관의 호가 소강인데, 지금도 󰡐소강회󰡑의 총무일을 보고 있을 만큼 연이 깊습니다. 선수시절 코치를 바꿔달라는 데모의 주동자로 몰려 국가대표에서 제명되어 퇴촌이 되었지요. 당시 대한체육회장이시던 민관식 회장의 재조사 지시로 해명이 되었고, 다시 입촌케 되면서 깊은 인연을 맺었지요. 그러나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없는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내 인생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내 인생 최대의 기쁨이지요. 원래는 불교신자였는데 1979년에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의 영향이 컸죠."(정동구 이사장은 현재 안수집사로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고 'PAS(태평양아세아 협회)'회장으로 대학생 해외선교활동에도 열심이다)

정 이사장의 멘토라면, 또 씨름선수에서 레슬링선수로 변신하게 된 과정은.
"양태성 형님입니다. 당시 그분은 중앙대 상무이사 겸 총장 비서실장 이었습니다. 그때 의형제의 연을 맺어 지금껏 모든 것을 상의하고 의지하며 지내고 있지요. 1978년 신혼가정에 끼어 살 정도로 가까이 지냈으며, 우리 아이들도 큰아버님으로 깍듯이 모시고 있습니다."

정 이사장은 변신과정에 대해 "1958년 제40회 전국체전이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충남대표 씨름선수로 출전하여 영남고에게 3대 2로 패해 아깝게 준우승을 하였죠. 경기는 서울운동장에서 있었는데, 시합 후 레슬링 경기를 보게 되었고 레슬링에 대한 열정이 타올랐습니다. 우연히 만난 선배이자 잊을 수 없는 스승인 최명종 선생님의 레슬링에 대한 희망적 말씀에 고무되어 편지를 보내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송순천(멜버른올림픽 복싱 2위), 김기수(복싱세계챔피언)을 배출한 스포츠 명문 성북고에 전학하여 최명종 선생님의 지도아래 레슬링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영길, 이원웅, 윤재기 그리고 나 4명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함께 서울로 왔지요."

국가대표선수 생활 중 대표적인 국제대회 출전경험은.
"1961년 요코하마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참가를 시작으로 1962년 제4회 자카르타아시아대회, 1963년 동경 프레올림픽 라이트급 3위, 1964년 제18회 동경올림픽 대회 6위, 1966년 토레도세계선수권대회 5위 등을 하였는데, 국제경기규칙을 몰라 이기고도 패한 경우도 있어 체육지도자의 육성이 관건임을 인식하게 되었죠."

"또 다른 열정의 불꽃을 태우리라"
"또 다른 열정의 불꽃을 태우리라"는 2007년 8월 정동구(鄭東求) 교수의 한국체육대학 정년을 맞아 정년기념식준비위원회의 이름으로 발간한 정동구 교수의 자서전이다. 용산(龍山)은 그의 호(號)다. 표지에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의 땀을 닦아주며 작전을 지시하는 사진을 실어 인생 최고의 영광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인터뷰 중에 증정 받은 자서전은 근대에서 현대를 격동으로 살아온 드라마 같은 한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불꽃같은 열정, 솔직함의 결정(結晶), 감동 자체였다.

책머리의 이태영 님이 쓴 송공(頌功)중 이런 대목이 있다. "...그의 이미지는 꺼질 줄 모르는 활화산(活火山)같고, 후퇴를 모르는 불퇴전(不退轉)의 표상처럼 보인다. 그는 양정모에게 계속 소리친다. "물러서지 마라, 앞으로 나가라."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그의 모습에서 한국인의 기백을 보았다." ...중략 "창조주의 깊은 사랑을 이웃에 전하며 실천한다"는 크리스천의 다짐,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는 좌우명의 진리, 그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 깔려있다." 인간 정동구의 단단한 속살을 파헤친 송공(頌功)의 백미다.

용산(龍山) 정동구(鄭東求) 이사장은 1941년 홍북면 용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홍북초, 홍성중, 홍성고에 입학 2년을 다니고, 성북고(현 홍익대부속고)로 전학했다. 중앙대(학사)를 졸업한 후 단국대에서 석사, 명지대에서 이학박사, 모스크바 레닌 체육대학에서 명예체육학 박사학위를 취득 하였다. 대한스포츠위원회 부회장, 한국올림픽성화회 회장, 아시아 대학스포츠연맹 회장, 서울시 체육회 부회장, 한국우드볼연맹 회장, 한국체육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거나 현재 진행형이다. 가족으로는 유소희(65)여사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정기환(71년생)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공군장교로 복무 후 현재 미국 국립원자력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딸 인아는 삼성기획실에서 근무하다 사위와 함께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