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항일의병 일으킨 홍주 인물 ‘의헌공 이광윤’
상태바
임진왜란 항일의병 일으킨 홍주 인물 ‘의헌공 이광윤’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1.04.29 2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성군·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세미나 열고 본격 역사고증 나서



임진왜란 당시 홍성에서 향병을 창의해 활약하다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헌공 이광윤에 대한 세미나가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주관으로 지난 26일 홍성문화원 1층에서 열렸다. 이날 세미나에는 이필수 충남도 복지환경국장, 이문원 전 독립기념관장, 김석환 군수, 최종돈 홍주향토문화연구회장, 변평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등의 내빈과 여주이씨 문중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석린 충북대 교수, 서흥석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오석민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박물관장의 발표와 송운호 계룡공업고등학교 교사, 김경수 청운대 교수의 지정토론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변평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은 개회사를 통해 “홍성군이 추진하고 있는 인물찾기의 일환으로 의헌공 이광윤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며, “이러한 연구는 국가적인 차원보다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홍성군의 역사인물찾기 운동은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업”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김석환 군수는 “그동안 의헌공의 업적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고증이 미흡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 한다”며, “이번 세미나를 통해 이광윤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고 선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소망 한다”는 내용의 환영사를 전했다.


이석린 교수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이석린 교수는 ‘임진왜란기 이광윤의 향병창의와 활동’이란 주제로, 이광윤의 학문적 연원과 의병결의의 배경, 향병의 구성, 순절하기까지의 의병활동의 활동상에 대해 소개했다. 이석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광윤은 당시 사회·경제적 기반이 탄탄해 자력으로 300여명의 의병을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인물이었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홍주·공주 등에서 향병을 창의한 후 조헌과 함께 온양, 아산 등지를 순회하며 16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의병군을 모집한 항일의병장이었다. 아울러 이광윤은 청주성`·금산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왜군의 호서침략의 근거지이자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석린 교수는 “이광윤이 금산전투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700여 명의 의·승병과 함께 순절했지만, 왜군을 퇴각시킨 결정적인 전과를 올려 호남을 지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밝히고 있다.



서흥석 연구원
서흥석 연구원은 ‘여주이씨 홍주파 가계와 이광윤 추숭활동’이란 주제로 이광윤의 후손에 20세기까지 이르는 이광윤 후손에 대한 가계를 정립하고, 후손들의 이광윤에 대한 추숭활동에 대해 소개했다. 이광윤과 이광복 형제의 후손들에 대한 소과·대과 급제 여부와 관력, 이들의 혼인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 여주이씨 홍주파 가계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서흥석 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이광윤의 직계 후손 가운데 장남 이대준 가계의 17세기 인물들은 대체로 음직을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18세기의 후손들은 문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해 청요직을 두루 지냈고 품계 또한 정 3품 당상 이상으로 높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대 국왕의 치적을 기록한 『선묘보감』에 이광윤의 성이 ‘이(李)’가 아닌 ‘조(趙)’로 잘못 표기되자 후손들의 끈질긴 상소 끝에 50년 만에 수정되었다는 기록도 발견됐다. 서흥석 연구원은 “이광윤이 임진왜란 이후에 낮은 증직을 받았기에 후손들의 추증에 대한 요구가 계속됐다”고 밝히며, “후손들의 노력으로 정조에 이르러 증직과 함께 증시의 은전이 내리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오석민 박물관장
오석민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박물관장은 ‘의헌공 이광윤 가계의 입향 과정과 유적’이라는 주제로, 황해도와 경기도에 분포했던 여주이씨 홍주파의 묘역이 홍주이씨 13세 이후로 당시 홍주목 화성 신기(新基)로 낙향한 연유에 대해 밝혔다. 오석민 박물관장에 따르면 홍주이씨 10세조의 외손 한명회가 부관참시를 당하자 13세 사원(師援)이 화를 피하기 위해 홍주로 낙향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주 이씨 홍주파의 입향조 이사원이 현재의 청양군 비봉면 방한리 속칭 ‘큰한술’에 자리 잡은 이후에, 방한리와 이웃한 홍성군 장곡면 옥계리 일원에는 여주 이씨의 묘역과 정려 등이 전하고 있다.

특히 장곡면 옥계리 산 77번지에 위치한 이광윤의 묘역은 1977년 7월 4일자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 17호로 지정된바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로 기본적인 정비가 이루어졌고, 보조금을 받아 충효사라는 재실도 건립된 상태이다. 오석민 박물관장은 “현재로는 추가적인 정비의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며, “다만 원래 재실로 쓰던 건물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정비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오 관장은 “이광윤의 정려 또한 묘소와 함께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므로 묘역과 함께 추가 지정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입향조 이하 4대에 걸친 묘역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만큼 방문객들의 편의를 고려해 이광윤의 묘소를 포함, 옥계리 여주 이씨 선영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도록 홍성군 옥계리 묘역 일원과 청양군 방한리 생가터와 녹정터 등을 함께 표기한 안내판 건립을 건의하기도 했다.

발표 이후 진행된 종합토론에서 송운호 계룡공업고등학교 교사는 ‘임진왜란기 이광윤의 향병창의 활동’에 대해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이광윤이 홍주지역에서 의병진을 구성한 이유, △의병활동의 근간이 되는 군량과 무기 확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배경, △임란이후 공신책록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경수 교수
아울러 김경수 교수는 ‘여주이씨 홍주파 가계와 이광윤 추숭활동’에 대해 “여주이씨 홍주파의 가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보충작업이 필요하다”며 “다분히 나열식으로 정리된 가계도에서 독창성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가계의 학문적 성향 혹은 사상적 경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향후 다양한 방법과 시각으로 가계의 학문적, 사상적, 재지적 경향성이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지길 기대 한다”는 내용의 소감을 전했다.

홍성군이 추진하는 ‘홍주역사인물찾기’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번 세미나는 의헌공 이광윤의 항일의병활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으로 보다 진일보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이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관계자는 “현재로써 이광윤에 대한 사료는 지극히 부족한 상태”라고 밝히며, “지속적인 사료발굴을 통해 심도 있는 연구를 이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