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축하 휘호 ‘조양홍주(朝陽洪州)’
창간축하 휘호 ‘조양홍주(朝陽洪州)’는 “용봉·오서산 상봉에 구름 맑게 갠 아침에 / 영웅지사 태어난 땅 황금빛 태양이 비치네 / 들녘의 곡식은 풍년 들고 목장엔 짐승이 살지는 푸른 들도 넓구나 / 낭보(朗報)를 새로 들으니 군민 모두가 즐거워하는 고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홍주향가(洪州鄕歌)
龍鳳烏棲開雲朝(용봉오서개운조)
英雄胎地照金陽(영웅태지조금양)
豊穀獸肥綠野洪(풍곡수태녹야홍)
朗報新聞同樂州(낭보신문동락주)

삼농 김구해 선생은 결성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탑의 휘호와 디자인, 설계를 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이다. 본지 기자가 결성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탑 제막식 행사에 참석하여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극구 사양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며칠 후 어렵게 전화로 대화한 내용을 간추려 기사화한다. (편집자 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막식 행사에서 인사드렸던 홍주신문 편집국장입니다. 그날은 바쁘시다고 사양하셔서 인터뷰를 못했습니다. 제주도에는 잘 건너가셨는지요?
“미안합니다. 그날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해서 이쪽 행사에는 차질 없이 잘 도착했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출생지가 원래 결성이신가요?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부락 155번지입니다.(현재 복원된 만해 한용운님 생가 옆집) 아주 자그마한 산골마을 잠방골(蠶房洞)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시면 혹시 만해선생님과는 어떤 관계라도 있으신가요?
“네, 있고 말구요. 우리 할머님(韓小順. 91세로 작고)의 작은 아버님이세요. 그런데 그 어른의 인생은 우국충절(憂國忠節)로 일관된 삶이셨기 때문에 제가 감히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투철한 애국심의 국가관, 출중한 항일 투쟁 독립운동, 불교개혁운동, 심오한 시문학의 작품세계는 온 국민 모두가 숭모하고 추앙하는 큰 어른이시기 때문에 누군가 관계를 물으면 대답하기조차 부끄럽고 두렵고 또 행동거지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이번 결성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탑 건립과정에서 선생님의 아이디어에 모두들 찬사를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제작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얘기를 하자면 매우 긴 시간이 소요될텐데 대강 말하자면 무슨 팔자소관인지 현재 제주도에서 17년(중국 절강대학생활 만 1년 포함)이나 살고 있어요. 100여년전 추사 김정희 선생의 약 9년간 유배생활과 발자취를 연구할 목적으로 임지를 제주도로 원하여 내려왔다가 보물섬의 해신(海神)이 제가 龜(거북 구)자에 海(바다 해)를 쓰는데 이름이 그러해서인지 육지에 못 가게 발목을 잡았나 봐요.
그러던 지난 4월 중순인가 광천읍장인 장광수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여러 채널로 수소문하여 찾았다고 매우 어려운 부탁을 한다면서 금년 6월 11일이 결성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으로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이런저런 뜻깊은 행사를 계획하는데 기념탑을 세우기로 결정한바 내 휘호가 필요하다는 요지였습니다.
‘아니 일정이 겨우 한 달 남짓 남았는데 이 일을 어찌하나?’ 여기(제주)에서도 문화행사다 무슨 일이다 해서 과분한 책임을 지워 떨치지 못하고 빠듯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셨는데 어떻게 결심하게 되셨나요?
“나의 출생지 홍성 결성의 고향 선후배님들이 뜻을 한데 모아 100년 만에 이루어지는 이번 사업을 멋지게 치르고자 하는데, 더욱이 그 어려운 사업경영 중에도 선뜻 성금을 내놓으시고 소득이 많지 않은 농어촌 생활에서도 눈물겨운 각 기별 성금을 모아서 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100주년 기념탑을 모교 교정에 세워 놓고, 1년에도 몇 차례씩 행사를 통하여 면민 모두의 화합과 유대를 도모하고 자라나는 후진들에게 희망과 꿈을 실현토록 하여 대대로 물려줘야겠다는 결의에 찬 신념 앞에 누구인들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겠어요? 무선전화 대화 중 장 추진위원장이 너무나 진지하고 의미가 무거워 음성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였습니다.
‘추진위원장! 진정하시고, 그러면 나보다 필치가 더 좋은 명필도 있고 거리도 멀고 일정도 촉박하여 가능할 것인가 의문스럽고 또 내 성격스타일에 그냥 대충 써 달라는 글씨 몇 자 써 보내주고 어느 마을 입구 이정표석처럼 새겨서 세워지는 것을 나는 원치 않으니 각자 생각을 신중히 해보고 다시 연락을 해보자’고 미뤘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장 추진위원장이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내가 1984년과 198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마지막 출품작이 연달아 특선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출품작가로 지정됐다는 소문과 한·중·일 국제전 참가 경력, 대한민국 21세기 중진서예가 10인 중 한 사람, 6공화국 출범 시 6·29 선언문 작성에 참여하는 등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며, 서예가는 보통 글씨만 잘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문학·역사·철학을 알아야 하고 조각·디자인 등 공간조형예술에도 일가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는 줄 이번에 알게 되었다면서 그래서 꼭 부탁한다고 매달리다시피 말했습니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고향에 가서 선후배님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마치 돌팔매라도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장 위원장! 이 일은 내 의견과 본 기념사업회 회장단, 그리고 동 추진위원들이 회의로 과감한 결정을 경쾌하게 매듭지워야 가능할텐데 그럴 수 있겠냐”고 물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기에 “O.K”, “정말입니까?”, “O.K”, “내일 회장단과 추진위원회의 때 승낙을 받았다고 공표해도 되겠습니까?”, “O.K”.
결국 이렇게 해서 제막탑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매사에 신중한 결정과 결정 후에는 끝까지 책임지는 성품이시고 매 작품마다 진지하게 연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시면 작품을 많이 못하시겠네요?
“기자님이 잘 보셨네요.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이고 또 그 점이 부족하지만 저의 브랜드 관리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고생하죠.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도공이 도자기를 빚어 불에 구워내는 과정이 꽤 어렵거든요. 몇 천도의 고열을 식혀 꺼낸 작품을 망치로 깨 버립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볼 때는 멀쩡한데 왜 깨버리겠어요? 자기의 작품이 옳지 않은 것이 세상에 나타나면 그 작가의 브랜드 즉 예술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것이 책임감이요, 참다운 예술인이 지켜야 할 고집과 최후의 양심입니다.
사실 여러 해 전부터 제 작품을 소장코자 하는 권력가와 재력가도 있는데 아직도 미결 상태입니다. 미안하죠. 나도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 내 손에서 떠나면 다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완성할 수 없죠.
이번 100주년 기념 작품은 특별한 경우죠. 일정도 촉박하고 거리는 멀어 항공편 왕래가 불편하고 한번 약속하여 마음먹으면 실행에 착수하되 우리 고장 문자로 ‘개갈 안 나게’ 절대 안하죠.
세워야 할 교정 현지답사를 시발점으로 하여 김근태 사장은 서울에서, 장광수 추진위원장은 홍성과 광천에서, 저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서울로 돌아 익산으로, 제주에서 군산으로 돌아 전라북도 익산 석공의 작업장으로, 보령 오석 공장으로 전화로는 모자라 수도 없이 여러 차례 확인 감독 관리차 기도하는 심정으로 다녔으니, 본래의 업무 수행중인 사람은 경비도 그러려니와 1인 다(多)역하는 정신적·육체적 고충이 어땠겠어요? 함께 오고가는 차 안에서 의견도 교환하면서 최소한의 시간도 절약했어요. 그리고 그동안 멀리서만 보다가 가까이에서 일 추진 수행 능력을 보니까 이분들은 어떤 큰일도 맡기면 능히 성공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신뢰를 확인했습니다.

이번 작품은 이구동성 100주년 기념사업행사의 꽃이요, 영구히 남길 명품이어야 한다는데 뜻이 일치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회장단은 물론 각 책임에 따라 장광수 추진위원장, 황선돈 총무 이외 집행진들 그리고 일선학교에서 애쓰시는 복기헌 교장선생님 이하 멋지고 고우신 선생님들, 학부모회 자모님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너무도 훌륭하고 멋졌다는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중요한 대목을 빠뜨릴 뻔 했네요. 얼른 보아도 대충 의미는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작품 이름과 디자인 설계와 내용을 짓고 휘호하신 의미가 따로 있나요?
“기자님이 보시고 바로 알 수 있었다면 성공적입니다. 당일 제막식 때 설명을 들은 분들은 아시겠지요. 저 혼자 한 것이 아니고 내 의견 시안을 회장단, 본부장, 추진위원 모두가 수용하신 겁니다.
제막탑에 대한 작품 해설을 굳이 하자면 첫째, 결성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의 상징성을 표현하기 위해 상단에 순백석(純白石)으로 책과 연필을 형상화한 것이고, 둘째 100년 동안 키워 낸 6884명의 졸업생들의 한결같은 모교 사랑과 애향심을 담아 비바람이 불어도 훼손되지 않을 까만 오석에 결성인의 희망과 웅지를 품고 창공을 향해 더 크고 더 높이 비상하려는 선학(仙鶴)을 떠받히는 꿋꿋한 의지를 형상화하고 작품명을 비상(飛翔)이라 칭했습니다. 셋째 큰 글자 내용은 청룡산을 주산으로, 석당산 내룡으로 뻗어 내려 힘있게 뭉쳐 결성현터를 감아돌아 상서로운 정기가 감도는 탯자리로 보아 현재와 미래의 결성인들은 정·관계, 경제·사회, 문화·예술 등 각 분야 어느 자리에 앉혀도 어울리는 인물이 계속 점지되고 순후(純厚)한 면민들 모두의 무궁한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는 무량복덕(無量福德)을 기원하는 길인(吉印)을 직접 새겨 찍은 것입니다”
아! 그러한 깊은 뜻이 담겨 있었군요. 설명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드네요.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홍성군민과 홍주신문 독자들에게 간략하게 한 말씀 해주시죠.
“이러한 기원을 해 보고 싶습니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당분간 출향하여 외롭게 떠도는 어린 예술인은 간절히 비나이다. 고향에 계신 조상님, 부모형제, 선후배들의 만수무강과 땀 흘려 가꾸시는 사업 번창과 홍성군민·결성면민 모두의 가정에 오복(五福)이 깃드시길 두 손 모아 비나이다. 제 마음 언제나 고향 하늘 향하여 달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