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시대에 있어서 종이신문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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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시대에 있어서 종이신문의 역할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1.06.1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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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참으로 정확한 말이다. 붓다가 말하는 깨달음은 “(현재 네가) 아는 것에 대한 철저한 부정” 즉, 관념으로부터의 탈피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때의 아는 것은 중생이 가지는 분별지(分別智)를 말한다.

분별지란 중생이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지혜로써 자신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진(眞)이라고 착각하여 집착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대상이 되는 경(境)에 대해서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등으로 구분 짓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번뇌는 작게는 ‘나는 빨강색이 좋아, 파란색이 좋아’ 정도로 나타나지만 크게는 인종청소와 같은 무자비한 살육과 과거 이데올로기에서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며, 현재 우리사회가 겪는 학연, 지연, ‘보수와 진보의 갈등’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중생의 고통은 본래부터 존재하거나, 어떤 실체가 있거나,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분별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중생이 갖가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에서 사바세계라고 말한다. 아주 쉽게 설명하면 사바세계의 고통이라는 것은 ‘상대적 빈곤감’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절대기준으로 하고 그 세계가 이루어지길 원하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예의·도덕규범·법(法)과 같은 어떤 기준이 마련되고 지켜져야 한다. 물론 이때의 기준은 절대적이거나 불변이 아니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다수(공동)의 이익을 위하며 목적과 방법이 선(善)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선은 여럿 중에 현실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채택했다는 의미로서 상대적인 것을 악(惡)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인 선이 아니다.

위와 같은 측면에서 본다면 사설과 편집을 통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히는 신문의 특성상 <홍주신문>은 매주 홍성과 홍성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홍성사회를 바라보고 진단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 매체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처럼 어떤 독자가 애써 신문기사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고 해도 읽는 순간 이미 어떤 문제를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언론의 특성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언론은 정치·자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라고 말한다.

최근 들어 모바일과 인터넷이 연동되면서 SNS라고 불리는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이 각 개인들이 뉴스와 정보를 생산하고 함께 공유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언론체계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언론과 한바탕 경쟁을 벌이고 있다. 비근한 예로 지난 4·27보궐선거에서 패배한 강재섭 의원은 솔직한 고백으로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필패론을 제기하면서 “투표 종료 1~2시간 전에 SNS가 쫙 돌아 젊은이들이 투표장 앞에 줄을 서는 일이 되풀이 될 것” 이라며 SNS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처럼 의기투합을 쉽게 이루며, 일단 시작되면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한국인의 역동성은 SNS와 같은 매체에서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실시간 어디서든 누구든지 뉴스의 주인이 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SNS는 실로 놀라운 언론매체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SNS에 비한다면 가장 고전적 형태의 주간신문이 전하는 사건사고는 뉴스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현재도 시도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전문적이고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뉴스로 만들어 내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봄이면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산나물을 소개하는 것이 뉴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새롭게 얻는 모든 정보는 뉴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화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SNS 시대에서는 더 이상 종이신문들이 사건사고의 보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여론을 조성하여 사회의 어떤 기준을 마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신문 간에 서로 공조를 통해서 각기 다른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생산해내어야 한다. 예를 들면 ‘갑’이라는 신문은 지역의 행정과 제도를 중점으로 다룬다면 ‘을’은 역사와 문화에 중심을 두고 ‘병’은 지역의 토산품의 개발과 판매 전략 등에 전문화 된다면 SNS와는 차별되는 언론으로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리라 본다.

이같이 급변하는 시대에서는 두돌(창간 4주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며, 지역신문이 성장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의 4년은 그만큼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지역에 큰 역할을 했음을 반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끝으로 홍주신문 두돌(창간 4주년)을 축하하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홍성발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리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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