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과 조르주 상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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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과 조르주 상드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1.11.17 17: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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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교수는 1500억 이상을 저소득층 자녀를 위해 기부하겠다니 마음이 훈훈해지기도 하고, FTA를 놓고 ‘너는 매국노 이완용’, 나는 애국자라며 삿대질하는 국회의원을 보면 씁쓸해지기도 한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쯤이면 꺼내 듣고 싶은 음반 하나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부르는 슈베르트(1791-1828)의 <겨울나그네>(Winterreise)다. 19세기 초, 유럽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직업도 없이 쓸쓸히 겨울거리를 방황하는 젊은이의 모습과 ‘거리의 악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저녁, 홍성의 거리를 지나다 나의 시선을 붙잡는 포스터가 있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 콘서트. 슈베르트와 쇼팽(1810-1849) 그리고 상드는 19세기 암담한 현실을 예술로 승화시킨 음악가들이다.

조르주 상드, 혼을 바쳐 남자들에게 사랑을 쏟아 부은 여인의 이름. 쇼팽과 10여 년간 열렬한 사랑을 나누다 편지 한 장을 남겨놓고 집시처럼 떠나간 여인. 상드는 쇼팽보다 6살 연상이었고 그를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녀는 이미 결혼하여 남편과 아이가 있었지만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에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객지 생활을 하던 쇼팽과 다시 결혼했으니 180년 전에 이미 연하의 남자와 결혼을 한 그녀는 ‘드메 신드롬’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항아리에서 불꽃이 샘솟는 것 같은 여인’(모파상),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성(性)의 한계를 극복한 여인’(라마르틴)이라는 상드에 대한 레토릭(修辭)은 다양하다. ‘결혼이란 자기희생에 불과할 뿐이야’를 외치며 무례한 남편과 그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페미니스트, 각혈을 하며 쓰러져 가는 시인 뮈세를 사랑했던 여인, 쇼팽과 이별한 후에는 조각가 알렉상드로 망소와 사랑에 빠졌던 그녀를 연애박사라고 해야 할까?

상드가 활동하던 19세기 초반 유럽은 평범함과 중산 시민계급이 자리 잡는 ‘비더마이어(Biedermeier)’시대였다. ‘Bieder’는 독일어로 ‘한심한’, ‘무기력한’의 뜻이며 ‘meier’는 평범하고 흔한 이름을 뜻한다. 즉 ‘한심한 마이어 씨’ 시대다. 1815-1848년에 이르는 이 시대는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가 강력한 철권정치를 하던 암울한 경찰국가시대다. 창밖의 아우성에는 아랑곳없이 슈베르트는 고독 속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방황과 고독의 ‘난민’이 되어 <겨울나그네>를 탄생시킨다. 우리 또한 5공화국 시절 어쩔 수 없이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며 암울한 시대를 보내지 않았던가.

쇼팽은 이러한 시대 폴란드에서 태어나 피아노 신동(神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유럽 문화의 메카였던 파리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몸이 허약하고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던 쇼팽은 ‘맑은 나의 음악은 그녀 덕분이며 내가 지치고 고독할 때 그녀의 눈길이… 나는 그녀를 위해서만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상드에게 의존한다. 마요르카 섬, 마르세이유, 상드의 별장을 오가며 안정된 생활 속에서 작곡을 하지만 그의 독특한 예술가적 기질은 상드와의 이별을 재촉하고 만다. 상드는 편지 한 장을 남겨놓은 채 또 다른 사랑을 꿈꾸며 떠나가니 남녀의 사랑은 늘 미완성 작품으로 남는가 싶다. 상드가 떠나자 쇼팽의 삶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아름다운 그의 음악만이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검열 받고 통제 당하던 ‘비더마이어시대’에 쇼팽과 리스트(1811-1886)는 오히려 주옥같은 선율을 그려낸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리스트는 피아노의 남성적인 웅장함을 두드린다. 쇼팽의 많은 곡들과 리스트의 ‘초절 기교’는 피아노의 현란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강압적인 시대의 우울함은 쇼팽이 피아노의 한계에 도전할 수 있게 한 외부의 힘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쇼팽의 곡 중에서 ‘혁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연습곡 ‘에튜트’는 MBC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 김명민이 외로울 때 신나게 건반을 두드리던 곡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2번 3악장 ‘장송 행진곡’은 우리들의 귀에 너무 익숙하며,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전주곡’ 연주는 거장의 모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녹턴(夜想曲) 제2번 E플랫 장조 작품 9의 2는 밤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고, ‘강아지 왈츠’는 상드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그의 주변을 빙빙 도는 강아지를 그렸다니 상드의 강아지 사랑을 눈에 보는 듯하다.

슈베르트의 가곡들과 쇼팽의 피아노곡 연주를 들어보고 상드의 불꽃같은 열정을 느껴보는 것도 ‘궁핍한 시대’의 영혼을 달래보는 ‘겨울여행(Winterreise)’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1월 30일 쇼팽과 조르주 상드를 홍성에서 만날 수 있다. 아울러 http://jsksoft.tistory.com에서 해설과 함께 많은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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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순 2011-12-05 21:44:07
초겨울의 쓸쓸함과 하루가 머다하고 씁쓸한 기사거리들이 우리의 눈을 찌푸리게 하는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내면을 음악가들을 통해 잘 연결해 주신 듯 합니다..... 어쩜 우리는 지금 한심하면서도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우울증 환자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울의 강을 건너 새로운 열정의 시대를 기원하며.....

홍민정 2011-11-19 15:19:30
바람부는 저녁 홍성의 거리에서의 사색이 떠오릅니다.
매년 11월3번째 일요일에 지내는 시제...일찍 출발했지만 시제 끝난후 그 도착함의 쓸쓸함
을 뒤로한채 홍성 거리의 늦가을의 풍성함에 즐거운 고향이었습니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안철수교수기부...FTA...그 먼 후대에 기억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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