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읍성과 산성을 모두 갖춘 계획된 성곽도시
상태바
수원 화성, 읍성과 산성을 모두 갖춘 계획된 성곽도시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11.11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18
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성곽으로 우리나라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성곽으로 우리나라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화성은 성벽 뒷쪽에 성벽과 같은 높이의 흙산을 쌓아 붕괴 막아
전통 성곽과 서양의 도시개념을 접목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도시
백성의 삶과 상업을 중시한 성곽, 소상인들 보호 상업을 활성화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 정조시대 때 세워진 계획도시로,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의 화산(현 경기도 화성)에 이장하기 위해 만든 성이었다. 묘(현륭원)를 수원의 화산에 옮기다 보니 원래 거기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다. 그 결과 팔달산 아래 신도시 화성이 건설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묘를 이장했기 때문에 만들어야 했던 수원 화성은 정조의 이상과 철학, 정치적인 노림수가 복합적으로 적용된 계획도시였다. 먼저 화성의 설계에 조선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을 기용했고, 화성의 공사 책임자는 남인 출신의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맡았다. 이는 노론 위주로 돌아가던 정국을 타파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과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해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했던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순히 이런 정치적 노림수에 의해서만 축조한 성이었다면 수원 화성은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성으로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성 자체의 목적에 굉장히 충실한데,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로써 각종 기능이 집약적으로 잘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먼 거리에서 성벽의 작은 간이 출입구가 보이지 않게 시각적으로 숨겨져 있는 점과 그로 인해 성벽 위에서는 시야 확보가 되지만, 성벽 아래에서는 구멍을 올려다보아도 절대 관찰자를 볼 수 없게 설계돼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화포의 화력 증대에 인해 성의 방어력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생기게 됐는데, 화성은 성벽 뒷쪽에 성벽과 거의 같은 높이의 흙산을 쌓아올려 포탄이 성벽을 관통해도 뒤의 동산이 지탱해 줌으로써 성벽 자체가 붕괴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 이외에도 수원 화성은 기존의 조선의 성에서 볼 수 없는 가장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읍성과 산성을 모두 갖춘 성곽 도시였다는 것이다. 즉 생활공간이면서 적군을 상대로 전쟁도 치를 수 있는 성곽으로 우리의 전통 성곽과 서양의 도시 개념을 접목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도시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 수원 화성 복원 ‘화성성역의궤’ 큰 역할
수원 화성은 백성의 삶과 상업을 중시한 성으로도 유명하다. 화성이 한양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는 위치에 있는 것을 고려해 전국의 상인들이 모여 거래할 수 있도록 길을 새로 만들었다. 또한 많은 양의 물건을 거래하는 대상으로부터 소상인들을 보호했고, 가난한 상인들에게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 주기도 했다. 이렇게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여러 정책이 실시됐고, 이런 정책 덕분에 화성의 경제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의 정책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놀라운 정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수원 화성은 조선의 그 어떤 성보다 심미적으로 뛰어남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는 정조가 화성을 축성할 때 아름답게 지으라고 명령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수원 화성은 방어적 기능과 성벽 안에 갖추어진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각기 다른 모양과 특성을 지닌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선 역사상 치밀하게 계산돼 축조된 수원 화성이긴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한국전쟁 때 전쟁의 화마로 인해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이후 복원을 계속했고 현재도 복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수원 화성의 복원에는 놀랄만한 사실이 있다. 바로 ‘화성성역의궤’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화성성역의궤는 수원 화성이 축조되던 1790년대 당시 정조가 봉조하, 김종수에게 화성의 축조 과정과 기타 제반 사항들을 모두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남긴 책으로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 6권, 부편(附編) 3권으로 이뤄져 있으며 총 10권 10책으로 구성돼 있다. 그 기술이 매우 자세한데 건물의 격자 하나하나가 가진 모양이나 축성에 사용된 재료를 어느 지방에서 출처해 공수해왔는지에 대한 내용까지 있으며, 심지어 건설 과정에 참여한 기술자 석수(石手) 642명, 목수 335명과 기타 일반 백성들의 명칭까지 모두 기록돼 있다. 그러기에 화성성역의궤라는 자료를 통해 수백여 년 전의 성을 100% 복원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수원 화성이 유일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원 화성은 수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5.7km로 성곽을 따라 둘레길이 조성돼 있어 예술성과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수원 화성은 수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5.7km로 성곽을 따라 둘레길이 조성돼 있어 예술성과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 성벽과 건물 등 2년 9개월 만에 완공
요즘 수원에서 가장 걷기 좋은 곳으로 수원 화성을 꼽는다고 한다. 성곽을 따라 이어진 길이 운치 있고, 옛 성벽과 도심의 빌딩이 어우러진 경치도 볼 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건축된 수원 화성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으며, 우리나라 건축 역사에서도 독보적인 건축물로 꼽히기 때문이다. 수원 화성은 ‘성곽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빼어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명을 받아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공이 축성 책임을 맡아 1794년에 착공해 1796년에 완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화성이 완성되자 정조는 그해 10월 16일,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금도 수원에서는 매년 10월이면 정조 임금의 행차 등 ‘화성문화재’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이러한 수원 화성의 둘레는 약 5.7km, 성벽의 높이는 4~6m에 땅속 깊이 1m로 기초를 다졌다. 동서남북에 놓인 창룡문·화서문·팔달문·장안문 등과 군사를 지휘하는 서장대와 동장대, 5개 포루, 봉돈, 치(치성), 공심돈, 수문, 각루, 노대, 적대, 암문 등 성벽과 모든 건물까지 불과 2년 9개월(장마 등 공사를 못 한 기간을 제외하면 약 2년 6개월)만에 완공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러한 이면에는 축성을 수월하게 도와주는 각종 기계를 발명한 점에 주목할 일이다.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을 발명해서 활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실학사상에 입각해 겉모양보다 실용적인 면에 치중한 부분도 눈에 띈다. 공격용 대포를 넣는 포루의 지붕이 말을 타거나 긴 창을 들고 갈 때 부딪힐 위험이 크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벽 안쪽의 지붕을 직선으로 마감한 것이 하나의 좋은 사례다.

이렇듯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던 것이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했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뤄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렀고,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해 정조의 진영을 봉안했다.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강점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됐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해,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했다. 2006년에는 행궁 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뤄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돼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뤄졌다.

수원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은 4대문 중 북문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남문을 정문으로 삼는데, 정조가 한양에서 올 때 북문에 먼저 닿아 장안문이 정문이 됐다고 한다. 문 밖으로 항아리처럼 둥글게 옹성을 쌓아 견고함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장안문에서 서쪽으로 가면 화서문을 지나 팔달산 정상에 세운 서장대에 이르고, 동쪽으로 가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을 지나 동문인 창룡문에 닿는다. 남문인 팔달문 밖에는 팔달문시장, 수원영동시장, 지동시장 등이 발달했다. 이중 팔달문시장은 정조가 팔도의 장꾼을 불러들여 만든 시장이라 특별하다고 한다. 

수원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어 가치와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