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전투 전승 100주년, 북만주 항일독립군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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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전투 전승 100주년, 북만주 항일독립군의 전설
  • 신우택 인턴기자(청운대)
  • 승인 2020.01.0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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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전투 전승 100주년의 해

겨우 열일곱에 집안 노비 문서 불태우고 재산 분배
고향인 홍주에서 기호흥학회 조직해 개화 활동 펼쳐
청산리 전투, 6일 격전 끝에 일본군 3300여 명 사살
백야,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암살 62년 건국훈장 추서


2019년은 그 어느 해보다 일본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해였다. 강제징용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사안에 일본은 경제적 조치로 보복을 가했으며, 일본 내에서는 혐한 시위와 군사적 위협이, 국내에서는 이에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에 완전히 해방됐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경제·군사의 첨예한 대립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그래서 일본과의 대립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먼 역사의 일도 아니며, 해당사항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100주년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단순히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이란 상징적인 숫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은 한반도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동아시아 외교·안보를 빌미로 철저하게 외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백야와 청산리 전투란 역사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홍주 출생의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진 않은가? 일본이 철저한 역사왜곡을 버젓이 자행하는 지금, 우리는 역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사는지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통해 돌아볼 계기가 있는 것이다.

■ 유년시절 김좌진
백야 김좌진은 1889년 충청도 홍주목 고남면 행촌리(현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아버지 김형규와 어머니 한산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병자호란때 전사한 선원 김상용 장군의 11세 손으로 구한말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은 백야의 백부였다. 

백야의 나이 열일곱 살인 1905년에는 서울로 간 형 대신에 집안 살림을 돌보게 되면서 집안의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그들에게 토지와 재산을 분배할 정도로 그는 개화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 민족 독립의 염원 평생의 신념으로
백야 김좌진의 청년기는 벼랑 끝 낭떠러지와 같은 난세의 폭풍 속을 걷고 있었다.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을사늑약(1905)등 한반도의 정세가 열강들의 한판 힘겨루기 각축장이 되면서 백야의 마음 속 깊이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신념을 품게 됐을 것이다.

우선 장차 나라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고향인 홍주에 호명학교를 세우고 기호흥학회를 조직해 여러 인재를 서울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1911년에는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인해 일제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3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아마도 백야가 항일 투쟁을 국내가 아닌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 전승 기념 부조.
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 전승 기념 부조.

■ 청산리전투, 불멸의 역사를 남기다
만주로 망명한 백야는 1917년 대한광복회 만주부사령관, 1919년 북로군정서 사령관으로 북만주 일대 군사 사령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반도를 발판삼아 본격적인 대륙 침략의 야욕을 보이던 일본에게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만주 지역 곳곳에 형성돼 있는 여러 항일 무장 독립군은 골치 아플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1920년 10월 일본육군 제13, 14, 21 사단 등 도합 5000여 명의 대병력이 북간도 일대 독립군을 공격한다는 첩보가 중국군으로부터 전해졌다. 백야는 민간인을 포함한 부대원 2800여 명을 이끌고 백두산 일대 깊은 골짜기인 청산리 일대에 부대를 매복하고 경기관총 수백 정을 주 방어 거점에 설치, 수천발의 탄약을 전선에 미리 배치하는 등의 방어진을 구축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1920년 10월 21일 아침 8시 선발대인 일본군 200명이 매복해있던 북로군정서 군의 화망에 들어오자 일제히 사격을 실시했고 선발대였던 200명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쓰러졌다. 전투는 6일 동안 지속됐으며, 양측은 △백운평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 등에서 치열하게 교전했다.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북로군정서 군은 흔들림이 없었다. 3300여 명이 전사하고 사단장까지 전사한 뒤에야 일본 사령부는 패배를 직감하고 지리멸렬하게 퇴각했다. 북로군정서 군이 병력과 물자 면에서 일본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사에서 전무후무한 압승이자 대승을 거뒀다.

■ 영웅의 최후 역사 바로알기 중요성
청산리 전투 이후 1929년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백야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오후 2시경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 금성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 순국했다. 장군의 나이 41세였다. 사후 장군의 유해는 1935년 부인 오숙근 여사에 의해 은밀히 밀장됐으며, 1958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로 이장돼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1962년에는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백야가 살았던 시대의 최대 과제는 나라의 광복과 짓밟힌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나라가 위급할 때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던 순국선열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린 그러한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매국하면 3대가 살고 애국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우스겟 소리가 기정사실이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해야 하며, 역사를 진영 논리에 맞춰 해석하는 사람들의 감언이설을 단호하게 내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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