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선생의 유허지와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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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선생의 유허지와 유허비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06.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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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우의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11〉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 114-1(매죽헌길 403-12)에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년 6월 8일) 선생의 유호비와 유허지가 있다. 유허지는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됐고, 유허비는 문화재자료 제164호다.

성삼문 선생의 유허는 성삼문이 태어난 집터이며, 사후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 건립된 곳이다. 입구 길가에 두 개의 비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유허비로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노은서원 유허비이다. 유허 안에는 사당인 충문사(忠文祠)가 있고, 왼쪽 언덕에는 노은단(魯恩檀)이 있다. 

이곳은 성삼문(成三問)의 외조부 박담(朴膽)의 고택이 있던 곳이며, 성삼문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676년(숙종 2) 사인(舍人) 이량(李湸)과 유생들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성삼문의 탄생지에 사우를 건립했다. 1685년(숙종 11)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를 추가 배향했다. 1692년(숙종 18) 조정에서 옛집을 녹운서원(綠雲書院)이라 명칭하고 사액했다가 1712년(숙종 38)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했다. ‘노은’은 민진후(閔鎭厚, 인현왕후 오빠)와 송시열(宋時烈)이 노산(魯山)의 ‘노’자와 은의(恩義)의 ‘은’자를 따서 동네 이름을 ‘노은(魯恩)’이라 했던 데에 기인한다.

1687년(숙종 13) 노은서원 옆에는 별사(別祠)를 건립해 성승(成勝, 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후 1784년(정조 8)에 성승은 별운검(別雲劒)으로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점이 인정돼 신원된 후 제향됐다. 그러나 노은서원은 1864년(고종 1)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됐다. 당시 유생들은 사육신의 위패를 매안(埋安, 신주(神主)를 묘소에 묻는 상례의식)한 다음, 그 위에 단을 쌓아 ‘노은단’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제향을 올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홍성고적현창회에서 제단을 보수했다. 유허비는 노은단에서 남쪽으로 30여m 거리의 마을 앞에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진상(金鎭商)이 썼으며, 전액은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성삼문은 고려 말 학자로서 외조부 박첨의 고택에서 1418년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글씨와 문장이 뛰어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고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숙종 2년(1676)에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했는데, 1864년 대원군 섭정 당시 노은서원은 철거되고 당시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현재의 노은단에 매몰했다. 노은리와 접한 대인리에는 성삼문의 부모 묘소와 처의 묘소가 있다.
 
성삼문(成三問)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선국 사간원 우사간 등을 지냈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했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해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했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운동을 했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열 세차레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했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과는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숙종 때 복권, 시호가 내려졌다. 조선왕조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는다.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김문기와 군기사(軍器寺, 지금의 서울 태평로)에서 처형됐다. 이를 사육신이라 부른다. 성삼문은 죽기 전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夜靑靑)하리라”란 시를 남긴다.
성삼문은 1418년 충청도 홍주(洪州, 현재의 홍성) 홍북의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를 낳으려고 할 때에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 한다. 형제로는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이 있다. 서울 노량진 사육신사당에는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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