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상흔 덮은 ‘홍주종합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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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상흔 덮은 ‘홍주종합경기장’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07.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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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15〉

홍성읍 소향리(홍덕서로 78번자 일원)에는 홍성군의 종합체육시설인 ‘홍주종합경기장’이라는 공설운동장이 있다. 다목적 경기장으로 주경기장인 종합운동장과 보조경기장인 홍주문화체육센터, 장애인종합체육관을 비롯해 인조잔디 축구장, 족구장, 테니스장, 국궁장, 양궁장, 풋살장, 게이트볼장 등 스포츠시설이 갖춰져 있다. 

홍성읍 소향리는 홍성읍 최북단으로 홍북읍 중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홍성읍 대교리, 서쪽으로는 홍성읍 월산리, 남쪽으로는 홍성읍 오관리, 북쪽으로는 홍북읍 중계리와 맞닿아 있다. 마을 남서쪽에는 2000년 10월 준공,2001 년 1월 개관한 족구장, 테니스장, 양궁장, 게이트볼장, 체육센터 등으로 구성된 홍주종합경기장이 있다. 홍주종합경기장의 부지는 9238㎡이며 1만5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322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3곳을 갖추고 있다.

홍주종합경기장 신축공사는 이상선 전 군수가 관선군수(제31대, 제33대) 두 번 재임 이후 민선2기 군수로 당선돼 재임하던 2001년 1월에 완공하고 첫 대외행사로 2002년 제52회 충청남도민체육대회를 홍성에서 처음으로 개최했다.

이상선 군수는 “당시 홍주종합경기장은 6·25한국전쟁 당시 홍성의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학살된 장소에 아픈 역사의 상흔을 뒤집어엎는다는 의미에서 군민을 위한 공설운동장을 건설하고 홍성 최초로 도민체전을 개최한 것을 큰 의미로 생각했다”며 “당시 홍성출신으로 국무총리를 지낸 이현재 국무총리가 축사를 했고 강복환 교육감도 최초로 도민체전에서 축사를 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홍주종합경기장이 들어선 홍성읍 소향리 일대는 6·25한국전쟁의 아픈 상흔을 간직한 땅이다. 한국전쟁을 피해 홍성역 근처 피난민수용소에 거주하던 피난민들을 이주시켜 형성된 마을이 있던 곳이다. 당시 7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이주했고, 1958년 미군 구호물자 배급이 끊기면서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살 길을 찾아 상경하거나 헤어진 가족을 찾아 외지로 떠나고 홍성 원주민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던 아픔과 희망이 교차했던 땅이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우리나라는 또 다른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완전한 독립을 얻지 못하고 당시 강한 힘을 가졌던 국가들에 의해 우리 민족은 국토와 이념이 나뉘게 됐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됐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3년여의 계속된 전쟁은 1953년 7월 북한과 남한은 국토의 허리를 끝는 분단의 생채기를 남긴 채 전쟁은 휴전에 이른다. 이후 남한으로 내려왔던 북한 사람들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됐으며 정착할 곳도 마땅치 않은 채 이산가족이 됐다. 남한 사람들 또한 전쟁이라는 비극 이후 비참한 가난과 배고픔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홍성역전에는 피난민들이 머무르며 생활할 수 있는 수용소가 있었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배고픔과 굶주림에 싸우며 살아가야만 했다. 정부에서는 어떻게 하면 피난민들의 정착을 돕고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궁리를 하다가 이들에 대한 대책으로 난민정착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홍성에서는 국유지였던 소향리 땅을 피난민정착지로 결정했다. 1953년 10연동 연립주택 6채를 지어 홍성역전 수용소에 있던 피난민들을 이주시켰고, 1955년에는 2연동 연립주택 50채를 지어 100세대를 형성해 입주를 할 수 있게 했다. 당시 유엔한국재건단(UNKRA)에서는 굴뚝이나 지붕 등을 만들 수 있는 주택 자재들을 지원해 줬고, 기독교 봉사, 가톨릭 구조위원회, 적십자회 등에서 밀가루, 강냉이가루, 우유 같은 식량을 지원했다고 한다. 사람이나 차가 다닐만한 길도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구호물자를 실은 차가 동네로 들어올 수 있도록 사람들이 직접 물길에 배수로를 치는 등 길을 닦았다고 한다. 소향리에는 지금 70여 가구에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러한 아픈 상처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와 이틀만인 27일 홍성에 다다르게 된다. 당시 홍성경찰은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 100여 명을 경찰서 상무관에 구금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7월 11일 보도연맹원 구금자를 전원 살해하고 홍성을 떠나 후퇴했다. 북한인민군은 7월부터 10월 7일까지 3개월간 홍성을 점령 통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홍성경찰서 유치장이나 각 면 분주소에 감금돼 있던 민간인들을 홍북 용봉산과 홍성읍 월산리와 소향리의 붉은고개 등으로 옮겨 집단 사살했던 것이다. 이곳에 들어선 홍주종합경기장 일원에는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딛고 희망과 기대를 품은 전진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아픈 상처를 간직한 한국전쟁은 어느덧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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