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정(余何亭)’이란 이름! 그대로 두어도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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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정(余何亭)’이란 이름! 그대로 두어도 되는 것인가?
  • 이상권 변호사
  • 승인 2020.07.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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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14〉

홍성군이 이번에 12경을 선정하고 제1경으로 홍주읍성의 ‘여하정과 조양문’을 선정했다고 한다. 홍성군청 후원에는 연못 가운데에 ‘여하정(余何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고, 300년 넘은 왕버들 나무가 옆으로 누운 채 연못에 줄기와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사시사철 철따라 갈아입는 아름다운 운치로 말미암아 옛 동헌인 안회당(安懷堂)과 더불어 홍주읍성을 대표하는  명물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홍성군지(洪城郡誌; 1983년 증보1판)에 의하면 여하정은 1896년에 당시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가 기존의 ‘청수정(淸水亭)’이라는 정자를 헐고 그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청수정은 1865년에 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사달정을 헐고 그 자리에 지은 것으로 이승우가 다시 여하정으로 이름을 바꿔 개축할 당시에는 나이 겨우 31년밖에 되지 않은 젊은 정자였다. 31년 동안에 열아홉 명의 홍주 목사가 다녀갔으니 그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1년 7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여하(余何)’란 무슨 뜻인가? 이는 독립된 의미가 있는 낱말이 아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려 한다면 ‘나는 어찌…?’이지만,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나 어떻게 해?’라고 풀 이 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글자의 조합에 불과해 그 뜻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여하정’의 의미도 역시 ‘나는 어찌…정자’로 밖에 해석하지 못하니, 그 이름 자체로 이 정자의 이미지를 떠올릴 도리가 없는 것이다. 또한 과문한 탓인지, 다른 그 어떤 자료에서도 ‘여하(余何)’가 독립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 문헌을 찾을 수가 없다.

한편 그 이전에 여하정 자리에 세워졌던 정자의 이름들은 다르다. ‘청수정(淸水亭)’은 맑은 물이 있는 마음 수련형 정자, ‘사달정(四達亭)’은 사방으로 통하는 소통형 정자, ‘애련당(愛蓮堂)’은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서정형 정자 등으로 이미지화하기가 매우 쉽다. 그런데 여하정 안에는 2005년에 채현병 홍성군수가 정자를 보수하고 기념한 ‘여하정 중수기(重修記)’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에는 ‘홍주목사 이승우가 정자를 세우고 여하정이라 하였다. 맑고 깨끗하게 마음을 다스리고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노력했던 곳. 余何 - 나는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여하’가 위 중수기가 말하고 있는 그런 의미일까? 한마디로 단언하면 ‘그렇지 않다’, ‘Never’이다.

‘여하(余何)’의 의미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하정 안에 있지만, 2005년의 중수기는 아니다. 여하정의 여섯 개 육각기둥에는 기둥마다 두 개씩, 12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서 1896년에 이승우가 정자를 다시 축조한 후 그해 음력 구월 구일(중양절)무렵에 지은 글을 판각해서 걸은 것이며, 스스로 정자의 중수기를 간략히 적으면서 벼슬아치로서 자신의 장래를 구상하는 글이다. 이 글에 열쇠가 있고 답이 있다.

余方有公事(여방유공사)  내가 바야흐로 공직의 일을 맡아 
作小樓二間(작소루이간)  자그마한 두 칸짜리 누각을 지었도다
懷伊水中央(회이수중앙)  물이 중앙 (누각)을 둘러싸고 있으며
樹環焉泉懸(수환언천현)  (왕버들)나무는 고리 모양의 샘(물) 위에 늘어져 있고
開方塘半畝(개방당반무)  개방법으로 계산한 연못의 넓이는 오십 평이다
九日湖之湄(구일호지미)  중양절에 연못가(에서 생각해 보건대)
一人斗以南(일인두이남)  천하에 (도와줄 이 없이) 혼자뿐이거늘
捨北官何求(사북관하구)  북쪽 지방 벼슬자리 내게 줄 이를 어찌 구할꼬
環滁;也皆山(환저야개산)  
저강(滁;江, 양자강 지류) 돌아가는 구비마다 죄다 산이듯이
於北豈無佳(어북기무가)  북쪽이라고 어찌 아름다운 게 없으랴
賓主東南美(빈주동남미)  손님과 주인 모두가 일러 동남쪽이 좋다하나
其必有所樂(기필유소락)  그곳(북)에도 필히 즐길 일이 있으렸다.

군지(郡誌)에는 위에 적은 필자의 해석과는 다른 내용의 해석이 실려 있다. 군지의 해석대로 이해한다면 유감스럽게도 매우 부실해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 아래에서 살펴본다.
‘개방당반무(開方塘半畝)’는 ‘연못을 열어 밭이랑에 물을 댄다’는 뜻이 아니다. ‘넓이나 부피를 계산하는 조선시대의 개방법(開方法)으로 계산하면 연못은 반무(1무는 100평)인 50평’이라는 의미이다.

‘구일호지미(九日湖之湄)’는 ‘갈마도는 햇살이 호반에 속삭인다’라는 뜻이 아니다. ‘음력 구월 구일(중양절) 연못의 가장자리’라는 단순한 의미이다. 아마도 그 뒤에 ‘~에서 생각해 보건대’ 등의 의미가 숨겨져 있거나 생략된 것이리라고 추정된다.

‘일인두이남(一人斗以南)’은 ‘남쪽은 한 사람의 도량으로 가하거니와’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두이남(斗以南)’은 ‘두남(斗南)’과 같은 말이고 ‘북두칠성이남’이라는 뜻이어서 ‘온 세상’, ‘천하(天下)’를 뜻하는 관용구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하에 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뒷 구절과 호응시켜 의역하자면 ‘천하에 (도와줄 이 없이) 혼자 뿐(이거늘)’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북관하구(捨北官何求)’도 ‘북쪽을 다스릴 관리는 어떻게 구하리오’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윗 구절과 호응시키면 ‘북쪽을 다스릴 벼슬자리를 (나에게) 베풀어줄(捨) 사람을 어떻게 구하리오’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자! 그러면 ‘여하’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시’라고 평하기 어려워서 ‘글’이라고 하겠다.)의 맨 첫 글자가 ‘余’이고, 여덟 번째 구절의 네 번째 글자가 ‘何’자이다. 이것이 바로 ‘여하’이며, 이 ‘여하’가 바로 이 글의 핵심이다.
 
‘여’자가 들어있는 첫 번째 구절과 ‘하’자가 들어있는 여덟 번째 구절을 합해서 엮어보면 ‘내가 공직의 길을 맡아 예까지 왔구나. 남부와 중부지방의 사또는 해봤으니 이제는 북쪽지방의 벼슬자리를 구해야 하겠는데, 나에게 그 자리를 베풀어 줄 사람을 어떻게 구할까?’라는 뜻이다. ‘余何’! 이 두 글자는 바로 이 뜻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그의 경력에 있다. 그는 세 번의 관찰사 경력이 있는데, 남쪽에서는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한 전북 고창을 관할하던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1895년에는 중부 호서지방인 홍주목 목사로 부임해 을미홍주의병을 잘(?) 관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1896년에 홍주부 관찰사를 지냈으며, 평균 재임기간이 다 돼 여하정을 짓고 이 글을 쓴 다음 그가 의도한 대로 북쪽지방인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시쳇말로 ‘경력관리’를 한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시(詩)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는 시라고 이름 붙이기에 매우 미흡하고, 기록물 내지는 메모에 불과한 형편없는 글 나부랭이를 작품처럼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 싶다. 또한 이 따위 자신의 사적인 벼슬욕심을 세상에 글로 공표해 역사에 유물로 남긴 목사 이승우의 정신 상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승우가 왜 서른한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목조 건축물을 헐고 새로 지었을까? 새 건축물에 부적(符籍)을 붙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필자는 추측한다. 그는 아마 가증스럽게도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비록 자신의 글을 읽더라도 자신의 더러운 욕심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余何’는 자신의 벼슬욕심을 달성시키고 싶어서 스스로 만들어 공공연하게 내건 부적(符籍)이었던 것이다. 이 부적이 오늘도 이 정자에 버젓이 붙어있다.

이승우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1895년 을미년말에 이승우 목사는 홍주의 대표적인 선비이자 의병장이던 김복한 선생과 이설 선생, 홍주향교 안병찬 전교, 홍주부 영장 홍건 등이 거병한 홍주의병과 관군이 항일 반외세운동을 합동으로 추진하기로 거짓 약속하고, 바로 다음날 의병의 지도부 23명을 홍주성으로 불러들여 모조리 구금시켜 버림으로써 홍주의병의 싹을 자른 사람이었다. 왕조의 입맛 또는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에는 맞춤형 인재였을지 모르나, 깨어있는 선비와 백성(民)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적과도 같은 행위로 승승장구해 1910년 일제에 나라가 병탄될 때까지 규장각 제학을 지낼 정도로 벼슬에만 연연했던 인물인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홍성군수가 ‘맑고 깨끗하게 마음을 다스리고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노력했던 곳. 余何 - 나는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칭송하는 중수기를 걸어놓아야 하겠는가?

정자의 이름만이라도 바꾸고, 창피한 벼슬아치의 사욕을 적은 열두 쪽 현판도 내려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이상권 facebook> 이상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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