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항구도시 개항 123년 ‘근대역사문화공간’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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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항구도시 개항 123년 ‘근대역사문화공간’ 부활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0.10.1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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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역사도시, 홍성도심재생 젊은 문화도시가 답이다 〈7〉
일제시대 목포 일본영사관으로 사용됐던 근대 건축물이 원형대로 잘 남아있다. 현재는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목포는 일제강점기 때 전국 6대 도시, 1897년 개항 항구도시로 성장
목포에는 다른 도시에 없는 근대건축물 많아 일제강점기는 슬픈 역사
목포의 특성과 역사 간직한 원도심·목포항 일대를 도시재생 전략 세워
목포가 열정을 쏟고 있는 원도심살리기 젊음의 도시로 기틀을 마련해

 

전남 목포는 1897년 개항한 항구도시다. 1905년 기선이 다니기 시작했고, 1911년과 1914년 도로와 철도가 서울까지 닿았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전국에서 3대 항구, 6대 도시로 꼽혔다. 

당시 번성하던 항구 풍경은 박화성의 ‘추석전야(1925)’와 송기숙의 ‘암태도(1979)’ 등에 기록돼 있다. 박화성은 여성 노동자의 눈으로 주택과 상점, 술집이 즐비한 혼마치를 별천지로 그렸다. 송기숙은 소작농들이 맞닥뜨린 경찰서와 법원 등 선창가 건물들을 위압적으로 묘사했다.

호남의 곡창에 눈독을 들인 일제는 이곳에 식민지배기관들을 설치했다. 일찌감치 유달산 아래 바닷가를 매립해 일본인 전용 거주지를 번듯하게 조성했다. 일제가 지었던 목포 일본영사관(1900·사적), 동본원사 목포별원(1905),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1921),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1929) 등은 여태껏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목포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 이후 쇠락을 거듭했고 산업화의 물결을 타는 데도 뒤처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낙후와 소외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군부독재 때는 정치적 이유로 차별을 받아 좀처럼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역사의 명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목포의 흔적들을 문화재청은 지난 2018년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했다. 등록문화재만 상가, 주택, 병원, 교회, 창고 등 28점을 헤아린다. 골목을 여럿 포함한 구역이 통째로 문화재 반열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는 설명이다. 
 

■ 도시재생 사업으로 활력… 승부수 던져
목포는 일제강점기 한때 전국 6대 도시였다. 1897년 개항 이후 한반도 서남부의 거점이자 항구도시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당시 목포 도심은 유달산 동남쪽에 형성됐다. 지도를 보면 노적봉 아래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는 사적 제289호인 ‘구 목포 일본영사관’ 남쪽으로 격자형 도로가 조성됐다. 계획도시임을 알려주는 전형적 징표다. 갯벌을 매립해 만든 땅에는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일본식 건물이 들어섰다. 콘크리트나 벽돌로 쌓은 건축물은 전통적인 조선 도시와는 다른 경관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목포에도 신도시가 생겼다. 목포역에서 동쪽으로 5㎞ 정도 떨어진 하당동과 전라남도청이 들어선 무안 남악신도시가 바로 그곳이다. 고층 아파트와 편의시설이 밀집한 신도시로 주민들이 떠나면서 목포의 구도심은 자연스럽게 생기를 잃었다.

원도심 공동화는 비단 목포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목포에는 다른 도시에 없는 근대건축물이 많다. 일제강점기는 슬픈 역사이지만, 분명히 한국 근대사의 일부다. 잊혀가던 목포는 1990년대 후반에야 기지개를 켰다. 서해안고속도로 개통과 무안국제공항 개항, 목포 신외항 건설 등이 숨통을 틔웠다. 하당택지 개발과 전남도청 이전 등으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권역 확대로 포화 상태에 이른 목포 내항은 북항과 신항에 기능을 나눠줬다. 산업물류는 대불항으로 이전하고, 자동차 수출은 신항이 맡게 됐다. 비좁던 어선 물양장과 수협 공판장은 북항으로 옮겨 갔다. 반면 내항에 목줄을 달고 있던 원도심은 이내 시들해져 갔다. 

목포시는 지난 2014년 도시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다양성 부족을 정체성 강화로 보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목포의 특성과 역사를 간직한 원도심과 목포항 일대를 재생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도시재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생활상을 품은 목원동 역사마을 △건축문화유산이 산재한 유달동 1897년 근대거리 △영화 ‘1987’의 연희네 슈퍼가 있던 서산동 보리마당을 중심으로 추진했다. 사업 과정에서 이 일대가 개화기 생활상을 재현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공간이라는 가치도 재발견했다. 

초창기에 뜨악한 반응을 보였던 주민들도 설득 끝에 뱃고동소리조합을 구성하고 만인계웰컴센터를 운영하는 등 참여로 돌아섰다. 민·관이 손을 맞잡으면서 문화재 야행, 선상 파시 재현, 낭만항구축제에 관람객이 몰리는 등 거리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선이 쏠리면서 지난해에는 손혜원 전 국회의원 등이 주택과 창고를 집중적으로 사들인 것과 관련해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다.

■젊음의 도시로 발전하는 기틀 마련
하지만 원도심 근대거리에 맞붙은 항구와 수변은 여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해양수산부가 4년 전 목포 내항을 역사문화거점형 항만재생 대상지로 선정했지만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책과 사업의 통일성과 연계성이 없어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주민들도 “먼저 원도심 근대거리의 재생이 무르익어야 수변공간으로 연장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반응을 내비치고 있는 현실이다.

해양수산부가 지난 2016년 10월 고시한 목포 내항의 항만재생 면적은 8만 8139㎡에 이른다. 이곳은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과 삼학도에서 가깝고,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무안공항 등에 인접해 접근성이 뛰어나다. 최근에는 국내 최장인 목포 해상 케이블카가 개통돼 줄을 서야 탈 수 있을 정도로 여건이 좋다는 설명이다. 기본계획을 보면,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이를 수 있고, 국제·연안 여객터미널에서 1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전한 수협 위판시설과 항만 공유수면을 활용해 시민이 누릴 볼거리와 놀 거리를 배치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에 따라 25%에는 해양문화관광지구, 75%에는 수상관광휴양시설이 자리를 잡게 된다. 다만 목포시는 내항의 항만재생보다 여객운송 확대에 기울어 있다고 한다. 연안·국제 터미널의 부두시설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서남해안의 관문 구실을 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화물운송은 약화했지만 대형 카페리 접안과 동남아시아 항로 개설 등으로 활로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변구역과 공유수면이 포함된 내항의 재생이 자칫 대형 선박의 접안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내비친다. 

김종식 목포시장은 “목포 내항의 어선과 해경은 이전했지만 제주 항로의 여객·화물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며 “카페리 대형화와 크루즈 상시 입항 등 새로운 요구에도 대비해야 국내뿐 아니라 중국 등 동남아 해상교류의 전진기지로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어서 목포항의 재생은 정해진 기간 안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는 예산을 지원할 의지가 없고, 민간투자로 진행한다면 사업시행자 공모와 실시계획 인가, 지구단위 계획 등 절차를 진행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호남선 철도의 종점인 목포역에서 내리면 오래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도심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선 승부수를 걸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떠나가고 상권은 쇠락하면서 한동안 을씨년스러웠던 곳에 희망이 보이고 있다. 이곳이 몇 년 새 부쩍 달라지고 있다는 분위기다. 임대 푯말이 붙어 있던 텅 빈 가게와 살림집에는 사람들이 들어왔고, 톡톡 튀는 이름의 공간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구도심 중 2826㎡ 일대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난 2018년 문을 연 청년 공간 ‘괜찮아마을’이 주목되는 이유다. 괜찮아마을은 박명호(33)·홍동우(34) 공동대표가 세운 문화기획사 ‘공장공장’이 시작한 프로젝트라고 한다. 식당, 여관, 상점 등이 빠져나간 자리를 임대해 사무실과 숙박, 식당으로 꾸몄다. 공유 공간 ‘우진장’,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 ‘춘화당’, 채식 전문식당 ‘최소한끼’, 음식점 ‘세종집’ 등의 새로운 간판이 달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곳에서 여행 프로그램, 각종 강습, 문화 체험, 교류 프로그램이 열린다. 설립 초창기에는 청년 50여명이 6주간 동고동락하는 프로그램도 운영됐다. 요즘은 치유와 휴식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면서 목포의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고 전했다. 목포시가 열정을 쏟고 있는 원도심살리기 사업이 서남해안 시대를 맞아 목포시가 명품 항구도시, 젊음의 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될 수 있을까.

 


 

미/니/인/터/뷰    독립영화관 협동조합시네마 MM 정성우 감독
 

구 조선미곡주식회사 건물 독립영화관으로 활용
 

일제시대 곡식 수탈의 중심이었던 미곡창고 건물이 독립영화관으로 재탄생됐다.
일제시대 곡식 수탈의 중심이었던 미곡창고 건물이 독립영화관으로 재탄생됐다.

 

정성우 감독.

일제시대 목포시에는 배편을 통해 쌀 수탈을 위한 미곡창고가 굉장히 많았는데, 그곳들을 관리하는 본사 역할의 ‘조선미곡주식회사’ 건물을 지난 2018년 3월경 50여명의 시민극장주가 모여 조합을 꾸려 전남지역 유일한 독립영화관인 ‘독립영화관 협동조합시네마MM(이하MM)’을 개관했다. MM의 1층은 일제시대 미곡창고 중 하나로 사용됐으며, 현재 상영관으로 탈바꿈된 2층은 조선미곡주식회사의 사무실이었다.

독립영화관 협동조합시네마 MM의 총괄기획을 맡고 있는 정성우 감독은 “2018년 3월, 10만 원에서 30만 원까지 자유롭게 마음을 모아주신 50여 명의 시민극장주의 힘으로 개관하게 됐다”면서 “나를 비롯한 6명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영상 제작, 교육 프로그램 진행, 팸투어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 관련 사업을 진행 중이며, 상시 영화 상영을 실시하고 있다”며 “독립영화는 최소 한 달에서 길게는 두 달 동안 상영되며, 외부의 도움 없이 운영해왔지만 현실적으로 녹록치 않아 지난해부터는 일부 지자체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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