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역사와 질곡의 세월 담고 있는 ‘태백산맥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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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역사와 질곡의 세월 담고 있는 ‘태백산맥문학관’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1.09.0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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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학관 활성화 방안을 찾다 〈13〉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에 지난 2008년 11월 21일에 세워진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의 ‘태백산맥문학관’ 국내 문학기행 명소 자리매김
 문학관, 전국적 명성 얻으며 ‘벌교 꼬막’도 함께 유명세 지역경제에 보탬
 태백산맥문학관에 전시된 1만 6500장의 육필 원고,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
 벌교읍내엔 소설에 등장하는 ‘보성여관’과 ‘벌교금융조합’ 등 건물도 복원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에 지난 2008년 11월 21일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전남 보성군 벌교읍 홍암로 89-19)이 세워졌다. ‘태백산맥문학관’에는 조정래 작가와 소설 태백산맥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비치돼 있다. 연면적 1375㎡(415평), 건축면적 979.7㎡ 규모로 80억 원을 들여 건립했다. 

문학관의 건축설계를 한 김원 건축가는 소설 ‘태백산맥’이 어둠에 묻혔던 우리의 현대사를 들춰냈다는 의미를 자연스럽고 절제된 건축양식에다 한 발 물러선 듯한 모습으로 시각화 했다는 평가다. 그런 이유에서 문학관은 10m아래에 자리하게 했다고 한다. 해방이후 민족분단으로부터 한국전쟁과 분단의 고착까지 소위 민족사의 매몰시대를 기둥이 없이 공중에 매달린 2층 전시실에 반영했다고 한다. 통일의 염원을 담아 북향으로 배치하고 옥상에 새 역사의 희망을 상징하는 18m의 유리탑을 세웠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제시한 민족의 허리 잇기의 염원이 언젠가는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건물에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읍의 ‘태백산맥문학관’은 국내 문학기행 명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 문학과 건축과 미술이 조화를 이룬 문학관
태백산맥문학관에는 조정래 작가의 육필원고와 검찰의 조사자료 등 조정래의 시대적 작가정신을 읽을 수 있는 문학사료 159건 등 719점이 전시 돼 있다는 설명이다. 관람객들은 전시물 가운데 조 작가의 육필원고와 함께 아들과 며느리, 독자 등 12벌에 달하는 필사본 원고에 대해 흥미를 갖는다고 문학관 측이 전했다. ‘태백산맥’이 모두 10권으로 이뤄져 있어 1벌 당 원고지만 1만 6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한다. 이처럼 생존한 작가의 소설을 본인 외에 많은 사람들이 육필로 옮겨 쓴 것은 세계 처음 있는 일이라고 문학관 측은 설명했다.

전시물 가운데는 조정래 작가가 1994년과 1996년 두 차례 검찰조사를 받을 때 작성한 ‘유서’도 포함 돼 관람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유서에는 ‘내가 지금 건강한데 갑자기 죽는다면, 타살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함께 작품 준비과정과 취재수첩, 일기장 등 치열한 창작과 작가정신을 엿 불 수 있는 사료들도 전시돼 있다. 이처럼 문학관이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벌교 꼬막’도 함께 유명세를 타 지역경제 활력에도 보탬을 주고 있다. 보성군은 개관 후 2년 동안 무료 개방 해오다 3년째부터 성인 2000원, 청소년 1000원씩 관람료를 받고 있으나 관람객은 줄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문학관 1층 전시실은 작가 조정래와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자료들로 이뤄져 있다. 소설을 쓰기까지의 과정, 취재 수첩에 담긴 그림과 내용, 다양한 사진, 소설 속 장면을 형상화한 조형물, 출간 이후 신문 보도 내용 등이 전시돼 있다. 무엇보다 문학관에 전시된 1만 6500장의 육필 원고가 시선을 압도한다. ‘혈서를 쓰듯’ 글을 썼을 작가의 고뇌가 읽혀진다. 취재수첩, 만년필, 카메라, 지팡이, 한복 정장 등에서는 작가의 체취를 읽을 수 있다. “필사는 정독 중의 정독이다”라는 글귀가 붙은 필사본 전시관에는 작품을 필사했던 위승환, 김기호, 노영희 씨 등의 원고를 포함해 독자 필사본 23세트가 놓여 있다.

충남 예산출신의 한국화가 이종상 화백의 오방색 자연석 벽화. 

전시실 1층의 통유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벽화는 압권이다. 충남 예산출신의 한국화가 이종상 화백의 오방색 자연석 벽화는 높이 8m, 폭 81m의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이라는 소설이 상징하는 것만큼이나 웅장하면서도 다채롭다. 모두 4만여 개 몽돌로 제작한 옹석벽화는 지리산부터 백두산까지 몽돌을 수집해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우리 민족이 겪은 질곡의 역사를 극복하고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의 아픔을 종식하는 통일의 간구를 고구려 고분 벽화의 모자이크 기법으로 표현했다. 소설 태백산맥의 문학성을 높이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건축적 언어로 담아낸 건물을 서로 보완하고 도움으로써 문학과 건축과 미술이 조화를 이룬 최대의 옹석벽화다. 민족의 염원이 투영된 벽화는 소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문학관 내부의 1만 6500장의 육필 원고가 전시된 모습.

■ 20세기 후반 최고의 베스트셀러 ‘태백산맥’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지난 1983년 9월부터 월간지 현대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해 1986년 제1부 3권, 1987년 제2부 2권, 1988년 제3부 2권, 1989년 제4부 3권이 한길사에서 출간됐고 이후 해냄출판사에서 다시 한 번 발간됐다. 원고지 분량은 1만 6500매다. 제목인 ‘태백산맥’은 한민족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광복 이후부터 6·25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맺음하기까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을 주된 무대로 해 한국 근현대사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소설이다. 벌교를 배경으로 한 소설답게 등장인물 대다수가 벌교 출신이며, 대부분의 사건이 벌교에서 벌어진다. 원래 설정은 여순사건에서 5·18 민주화운동 혹은 1992년 대선까지였지만, 작품을 둘러싼 각종 논란과 법적 소송, 작가 개인의 체력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사정으로 인해 한국전쟁 직후 결말을 맺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게 사용되지 못한 구상의 일부는 제3공화국을 시대 배경으로 한 소설 ‘한강’으로 공개됐다. 1945년 8월부터 1953년 8월까지와, 그 다음의 세월이 시대적 특성으로 보아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앞의 8년이 ‘민족자주독립국가 수립 노력의 시대’라면, 그 뒤의 세월은 ‘민족통일 추진의 시대’인 것이다. 이렇듯 ‘특성이 다른 시대를 한 작품으로 엮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무리였다’고 태백산맥 8권의 작가의 말에서 고백하고 있다.

어쨌거나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대단한 히트를 기록해 1300만 부 이상이 팔리고, 200쇄 이상 인쇄했으며, 470만 세트가 팔린 20세기 후반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고 있다. 주인공이 좌익이라는 점 이외에 온갖 빨치산 활동이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등 군사정권 당시부터 터부시되던 점들을 집중 조명해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부터 11년간 이념시비 문제로 법적 분쟁까지 간 작품이다. 용두사미라 해 까이고 있기도 한데, 이건 개인적 취향에 따른 문제이나, 마무리를 후다닥한 감은 있다고들 지적한다. 이는 당초 계획이 좀 더 길었으나, 결국 작가 개인이 겪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창작력의 문제 때문에 ‘빨치산’ 이야기로 소설의 주제가 한정됐기 때문이다. 결국 소설을 통해 말할 수 있는 범위가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한국문학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대하소설로 평해진다. 작가 조정래는 이후 ‘아리랑’과 ‘한강’도 집필했으나, 최대 히트작품은 ‘태백산맥’으로 남았다.

태백산맥문학관 내부 모습.

소설에는 김범우, 염상구, 새끼무당 소화 등 270여 명이 등장한다. 크고 작은 사건들은 정치하게 엮여 ‘태백산맥’이라는 거대한 그릇에 담겼다. 흔히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은 인물을 창조한다는 말이 있는데 ‘태백산맥’을 읽고 나면 그 말의 의미가 새삼 실감된다. 벌교에는 소설 속 공간들이 남아 있다. 실재하는 공간은 상상력을 압도한다. 길을 걷노라면 어디선가 열차가 달리는 환청을 듣게 되는 시커먼 철교는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놓인 철다리다. 소설 속 인물 염상구가 벌교를 접수하기 위해 깡패 왕초 땅벌과 결투를 벌였던 곳이다. 철교다리를 지나 걷다 보면 ‘소화다리’를 만날 수 있다. 1931년 6월에 건립된 철근콘크리트 다리로 원래는 ‘부용교(芙蓉橋)’라 불렸다. 소화다리는 비극과 상처가 응집된 공간이다. 여순사건, 6·25한국전쟁의 격랑을 거치면서 양쪽의 세가 갈릴 때마다 총살형이 이뤄졌다. 벌교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홍교(횡갯다리)는 뗏목다리에서 비롯된 무지개형 돌다리로 1729년에 건립돼 벌교의 근원성을 가지며, 보물 제304호 지정됐다.

벌교읍내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유사하게 복원한 건물도 있다. ‘보성여관’과 ‘벌교금융조합’(현 벌교농민상담소)에는 당시의 분위기가 감돈다. 원래 명칭보다 소설 속의 ‘남도여관’으로 알려진 보성여관은 당시 일본인들의 중심거리인 ‘본정통’에 있었다. 2004년 12월 근대사적, 생활사적 가치가 인정돼 등록문화재(제132호)로 지정됐다. 현재 보성여관은 문화유산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1943년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난 조정래 작가가 치열하게 기록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걸어온 질곡의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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