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근대문화유산, 증명할 건축물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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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근대문화유산, 증명할 건축물 얼마 남지 않았다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04.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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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2〉
예산 신암면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 고택.

도시 건축물의 개념은 삶의 터전이자 역사문화의 바탕이다
추사 김정희의 옛집, 예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대건축물
수덕사 대웅전,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최고의 목조 건물
호서은행 본점, 1913년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 지방은행 

 

사라지는 원도심의 근대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하느냐의 문제는 결국 남길 것과 부술 것을 가리기 위함의 문제다. 역사가 짧은 근대문화유산은 대체로 다시 쓸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유물처럼 박제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등록문화재 취지 자체도 ‘일상생활에 맞게 다양하게 활용해 문화재를 적절히 보호한다’는 데 있다.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관광자원화’나 ‘지역자산화’도 강조된다. 근대문화유산이 ‘돈이 된다’는 셈이다. 하지만 수십년 된 건축물을 새로운 용도로 쓰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 건축물 본래 용도를 바꾸려면 내부 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처음 지었을 당시와는 필요한 주차공간이나 설비 조건도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도시 건축물의 개념은 삶의 터전이자 역사문화의 바탕이며, 살아 있는 역사로 생명체나 다름없다. 더 나아가 살아 숨 쉬는 역사교육의 장, 문화예술의 공간으로도 널리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가치를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시작으로 역사문화의 경쟁력이 지역발전이나 지역의 정체성을 이끄는 시대적 흐름을 역사문화·관광 사업에 더욱 반영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 예산 1100년 역사, 추사고택과 수덕사
1100년 역사의 예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대건축물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옛집을 꼽는다.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이 지은 집이라고 전한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돼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을 하고 있다. 각방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했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뤄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해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했고, 안방과 부속 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했다.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에 위치하고 있으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됐다.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로, 집안 할머니뻘인 정순왕후가 영조의 계비로 간택됨에 따라 해미 한다리 경주김씨 가문은 왕실의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크게 성장했다. 추사는 이런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총명함과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기량도 갖추어 국제적인 학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안동김씨 세도가문에 밀려 부친 김노경이 유배되고 자신도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서서히 가문의 쇠락이 찾아온다. 추사는 만년에 봉은사를 오가며 살았고 죽기 3일 전에 썼다는 ‘판전’ 글씨를 봉은사에 남겼다. 예산에는 추사가 태어난 고택이 있고 고조부 김흥경부터 추사의 묘까지는 추사고택 인근에 있다. 부친 김노경의 묘만 과천 옥녀봉 기슭에 있었으나 실전(失傳, 묘지나 고적 따위에 관련돼 전해 오던 사실을 알 수 없음)됐다고 한다. 김한신이 부친 김흥경과 선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화암사는 추사가 학문을 연구하고 불교를 궁구한 사찰로 추사의 암각글씨가 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시절, 동생들과 함께 화암사를 중수 상량문도 지어 보내고 시경루, 무량수각 현판도 써 보냈으나 이 현판들은 지금 수덕사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本寺)로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했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했고 원효(元曉)가 중수했다고도 전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다. 우리나라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를 올린 전형적인 주심포(柱心包)계 건물로, 11줄의 도리를 걸친 11량(梁)의 가구(架構)를 갖췄다. 1937년에 건물을 뜯어서 수리할 때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이 건물이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됐음을 알 수 있었으므로, 건립 연도가 확실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3년 5월 설립된 최초의 지방은행인 호서은행 본점, 현재 예산새마을금고로 이용되고 있다.

■ 100년 전통 호서은행 본점, 지역명물로 
1913년 5월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지방은행인 호서은행 본점(충청남도지정기념물 제66호)이 예산 중심가에 있다. 1922년에 건축된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 예산새마을금고로 이용되고 있다. 호서은행은 1913년 5월 예산지역 지주인 유진상(兪鎭相)·성낙규(成樂奎)·유진태(兪鎭泰)·성낙헌(成樂憲)·이기승(李基升)·최규석(崔圭錫)과 서울의 김진섭(金鎭燮)·함태영(咸台永) 등이 자본금 30만 원으로 설립한 은행이다. 호서은행은 조선에서 9번째 설립된 은행이었으며, 조선인이 설립한 은행만을 대상으로 하면 5번째 설립된 민족계 은행이었다. 호서은행은 일제의 금융 침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민족자본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1917년 광천지점, 1919년 천안지점·안성지점, 1921년 홍성지점, 1928년 장호원지점을 설치했다. 1931년 1월 한일은행과 합병해 동일은행으로 개칭됐다. 호서은행의 설립은 한말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22년까지 은행장을 맡았던 유진상은 예산지역에 설립된 사립 배영학교를 운영했으며, 성낙규는 교장을 역임했다. 후임 사장인 김진섭은 성낙헌과 함께 기호흥학회에 참여했다. 이처럼 지방은행인 호서은행은 계몽운동을 통해 형성된 인물들이 중심이 돼 설립한 민족계 은행이었다.

또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예산의 신암양조장은 예산 지역민에게 사랑받는 신암막걸리를 생산하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37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소화(昭和; 1926년부터 사용된 일본연호)시대의 술항아리 7개가 있다. 현재 신암양조장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 건물구조 일부가 남아 있고, 1958년도에 중수했던 상량문이 있어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예산의 소중한 건축물이다. 예산군은 신암양조장의 가치에 주목했다. 2021년 충청남도로부터 등록문화재 지정연구용역을 추진했다. 충청남도 문화재심의를 거쳐 등록문화재가 되면 지역의 명물인 신암막걸리의 명성이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예산성당(충남도지정기념물 제164호)은 전형적인 삼랑식(三廊式) 성당 건축이며 외관의 전체 구성은 단순하나, 처마돌림 띠, 창둘레 아치 장식 등의 비례가 뛰어난 근대 성당 건축물로써 1933년에 착공, 1934년에 준공했다고 한다. 한국인 신부에 의해 건립된 건축물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높으며, 일본의 건축문화를 수용·혼재하지 않고 서양의 건축문화를 직접 수용해 토착화한 건축양식으로 근대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출물이지만 일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어졌다고 해서 더 의미가 깊고 가치가 더한다. 지난 2004년 4월 1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됐다.

이밖에도 근대건축물로는 1920년대에 일본인 의사가 지었다는 예산의 의료시설이었던 대동병원이다. 해방 이후 고 최익열 원장이 매입해 2000년 최 원장이 별세할 때까지 예산군민은 물론 장항선 일대 주민들과 한 시대를 같이 한 의료시설이었다. 이처럼 근현대문화유산이라고 해도 사유재산은 강제적인 보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호서은행과 예산성당 등을 제외하면 화려했던 예산지역의 근대사를 증명할 건물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예산지역 문화계의 진단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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