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원도심의 역사·문화유산이 도시의 정체성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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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원도심의 역사·문화유산이 도시의 정체성 형성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05.1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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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4〉
옛 선교사 가옥. 20세기 초 공주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근대식 교육, 그리고 의료활동이 시작된 상징적인 공간이다.

공주 원도심의 역사문화유산, 도시의 정체성으로 자리해
공주,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까지 충청도 행정의 중심지
근대교육의 산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주도 애국자 길러
공주 근대문화유산, 천년을 뛰어넘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

 

충남 공주의 원도심은 충청도의 정치, 행정, 사회, 문화를 선도해 온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충청과 공주의 역사문화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도시다. 공주 원도심 곳곳에는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역사문화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어 도시의 정체성으로 자리하고 있다.

옛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중심지로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에서 찬란한 역사문화의 전성기를 이루며, 고려시대에는 하남도(河南道), 조선시대에는 충청도(忠淸道)라 불리다가 1896년 8월부터 ‘충청남도(忠淸南道)’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그렇게 불리게 됐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10월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게 됐다.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은 80년만인 2012년 12월 지금의 홍성·예산내포신도시로 옮긴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공주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까지 충청도의 행정의 중심지이자 주요 거점도시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도시다. 공주는 홍주(지금의 홍성), 청주, 충주와 함께 목사가 고을을 다스리던 충청도 4목(牧) 중 한 곳이었다. 결국 충청남도청은 옛 목사 고을인 공주를 거쳐 또 하나의 목사 고을인 홍주의 내포에 안착한 셈이다.
 

옛 공주읍사무소 전경. 2021년 8월 ‘옛 공주읍사무소’로 개관. 공주 지역의 근대 생활사를 알 수 있는 공간으로 단장해 공주를 찾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 공주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골목길에 가득
공주는 충남도청을 비롯해 충청남북도를 전체적으로 관할하던 지방법원 등 주요 관청과 부속시설들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이와 함께 병원, 학교, 은행 등 근대적인 도시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당시 공주가 얼마나 번창했던 도회적 시가지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공주의 원도심 거리는 공주를 가로지르는 금강 남쪽에 자리 잡은 근·현대 주민들의 삶을 간직한 곳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공주 원도심을 가로지르는 근대문화유산탐방길은 근·현대 격동기를 지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일제에 항거해 온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공주의 근대역사문화 탐방은 공주시내를 중심으로 자리한 종교시설과 병원, 학교들은 근대교육의 산실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자들을 길러냈다.

원도심 근대문화유산길은 중학동 옛 선교사가옥(등록문화재 제233호)과 영명학교, 중동성당, 자혜의원, 공주제일교회(등록문화재 제472호), 옛 공주읍사무소(등록문화재 제433호), 공주지방법원, 공주형무소, 옛 충남도청, 잠종취체소, 원잠종제조소, 잠업전습소, 금강철교(등록문화재 제232호) 등이 연결되며 골목길을 잇고 있다. 

중학동의 옛 선교사가옥은 20세기 초 공주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근대식 교육, 그리고 의료활동이 시작된 상징적인 공간이다. 1910년대 말~1920년대 초에 건립된 건축물로 공주지역의 초기 서양식 건축양식을 담고 있다. 공주제일교회는 수원 이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감리교회라고 한다. 의료와 교육이라는 두 가지 주요 정책을 중심으로 학교와 병원을 함께 운영하며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중동성당.

현재 교회 내부는 박물관으로 꾸며 놓아 교회의 사회공헌 활동을 돌아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옛 공주읍사무소는 공주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1923년 충남금융조합회 사무실로 건립돼 일제 강점기 건축물의 원형을 최대한 간직한 근대건축물로 공주읍사무소, 공주시청 등으로 사용됐다. 2009년 공주를 대표하는 근대건축문화재로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등록됐다.

영명학교에서 충남역사박물관 방면 언덕 위에는 웅장한 성당이 보인다. 충청도 서해안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가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지어진 대표적인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리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옛 충남도청은 조선시대 충청감영이 위치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감영을 대신해 충남도청이 들어섰고,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충남의 행정의 중심지였다. 옛 충남도청 자리는 현재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자혜의원은 일제강점기에 각 도에 설치됐던 근대식 의료기관이다. 충남지역에는 1910년 9월 5일 관립 공주자혜의원이 공주목 관아시설 자리에 설립됐으며, 1925년 4월 충청남도립공주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자혜의원 자리는 현재 공주목 관아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공주지방법원은 공주지방재판소가 일제의 사법제도 개편에 따라 1912년 공주지방법원이 됐으며, 충남지역 1심 재판을 관할 했다. 충남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공주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을 받았다. 현재는 이 자리에 공주세무서가 자리하고 있다.
 

신홍식 동상과 공주제일감리교회 예배당 전경. 지난 2018년부터는 공주 기독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가치 인정받다
공주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천년을 뛰어넘는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명실상부 세계유산도시로 거듭난 곳이다. 공주는 예로부터 ‘교육의 도시’로도 불렸다. 명문 중·고등학교가 모여 있어 인근지역에서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많은 학생이 몰렸고, 어렵사리 입학한 학교를 다니기 위해 하숙을 선택하는 학생이 많았다. 당시 한 집에 방이 13개 정도 되는 하숙집이 있을 정도로 하숙은 중동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지금도 그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하숙마을이 남아있다. 이곳 중동은 관광명소인 중동성당, 제일교회, 영명학원, 충남역사박물관, 공주역사영상관, 풀꽃문학관 등과 함께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제일교회는 공주지역 기독교 활동의 중심지이며 3·1만세운동 주도, 공주지역 청년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신간회운동에 참여했고, 각종 강연회와 약학회 등을 통해 신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근대기 사회복지관을 운영하는 등 공주지역 사회복지와 교육을 주도했다. 영명중고등학교 교문 옆에 자리한 3·1중앙공원은 앵산(櫻山)공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자 앵(櫻)은 벚꽃을 의미하는데 지역 인사들은 충남역사박물관과 이곳에 벚나무가 많이 있어 그리 불렸던 것으로 추측한다. 공원 한가운데는 유관순 열사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산 뒷면에는 유 열사의 생애와 유 열사를 교육으로 인도한 선교사 앨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의 생애가 기록돼 있다.

공주근대문화탐방길의 종착지인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과도 인연이 있는 사애리시는 천안에 살던 열한 살 소녀 유관순을 공주로 데려와 1914년부터 2년간 영명여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1916년 이화학당에 추천해 서울유학길을 열어 줬다. 선교사 사애리시는 1904년 영명중고의 전신인 명선학당(영명여학교)을 설립하고 여성교육의 길을 열었다. 공주영명학교는 사애리시 부부의 후임으로 파견된 선교사 윌리엄(한국명 우리암)이 1906년 설립했다. 이때 명선학당은 영명여학교로 개칭하고 1932년 남녀공학으로 개편됐다. 영명중고에 세워진 100주년 기념탑에 유 열사의 흉상이 세워진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영명중고교 100주년 기념탑 앞의 공주역사전망대에는 아크릴판에 옛 공주시가지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현재의 산 지형과 일치시켜 보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명중고에서 기독교박물관으로 가는 길 벽면에는 공주읍 만세운동의 기록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공주만세운동은 영명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주축이 돼 고종황제 국장이 거행된 지 한 달째이자 공주 장날인 4월 1일에 열렸다. 벽면에는 우리말로 풀어 쓴 독립선언서가 적혀있다.

오늘이 쌓여서 과거가 되고, 과거가 쌓여서 역사로 기록되는 본질에는 공주의 유서 깊은 문화와 유적이 있다. 공주의 근대문화유산을 따라 걷다 보면 역사는 그리 멀고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천년을 뛰어넘는 문화유산에서 저절로 스미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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