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로도 붓을 사던 110년 代를 잇는 ‘구하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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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로도 붓을 사던 110년 代를 잇는 ‘구하산방’
  • 취재=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2.06.0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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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다, 100년 가업을 잇는 사람들 〈5〉
현재 인사동 네거리에 자리를 잡은 구하산방 전경. 처음 문을 연지 1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홍 대표는 손님에 꼭 맞는 붓을 추천하기 위해 항상 필방을 방문한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다. 

전문 서화 재료를 파는 필방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1913년 개업, 우리나라 최초의 필방 3대째 110년 세월 대를 잇다
1000여 가지 넘는 붓, 벼루, 화선지 만드는 가업의 명맥 이어와
해방 후 홍성출신 고암 이응로 화백 등 유명 화가, 서예가들 애용

 

예로부터 글공부를 좋아했던 선비들의 방에는 꼭 ‘문방사우(文房四友)’라는 것이 있었다. 문방사우란 소위 ‘지필연묵(紙筆硯墨)’이라 해 종이, 붓, 벼루, 먹 등을 말하는데,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네 가지의 벗이라 해 문방사우라 했다. 이것들을 ‘친구처럼 가까이 하라’는 뜻에서 문방사우라 했다. 그중 종이와 붓, 벼루, 먹은 백제와 신라 때의 유물이 남아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붓은 붓털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썼는데, 처음에는 나뭇가지의 끝을 짓이겨 털처럼 부드럽게 만들어 쓰다가 나중에는 짐승의 부드러운 털을 묶어 쓰기도 했다. 붓대는 반듯하고 가벼운 대나무를 주로 사용했다. 이러한 전통과 비법을 100여 년 세월이 넘는 동안 대(代)를 이으며 지켜오는 곳이 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골목길 한켠에 자리 잡은 ‘구하산방(九霞山房)’이란 필방(筆房)이 바로 그곳이다. 인사동 네거리에서 공평동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왼편에 ‘구하산방’이 있다. 인사동에서 전문 서화 재료를 파는 필방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구하’ 또는 ‘구하산’은 옛 중국 시에 보이는 말로, 신선이 노니는 하늘 뜨락, 또는 하늘 정원 속의 깊은 산, 즉 ‘선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1913년 처음 문을 연 한반도 최초의 필방인 ‘구한산방’은 ‘구한말에는 고종임금과 순종임금도 애용했던 필방’이라고 설명한다. 임금이 애용하면서 구하산방의 붓이 궐에도 소문났을 정도니, 당대의 내로라하는 ‘묵객’들은 모두 이곳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묵객들 중에는 홍성출신의 동양화가 고암 이응노 화백을 비롯해 당시 우리나라의 내노라하던 이당 김은호 화백, 청전 이상범 화백, 소정 변관식 화백, 미석 박수근 화백 등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서예가, 화가들은 모두 이곳의 붓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오랜 역사와 붓에 대한 전문성의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0여종에 이르는 각종 붓이 진열돼 있다.

■ 3대째 110년 세월 대를 잇는 필방 전통
1913년에 개업을 한 우리나라 최초의 필방이 3대째 110년 세월 대를 이으며 전통을 잇고 있다. 천여 가지가 넘는 붓과 벼루, 화선지 등을 만드는 이 가업의 명맥을 어렵게 이어가고 있다. 구하산방은 1913년 충무로 진고개에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전까지는 마을마다 제작자들이 있어 좌판에 놓고 문방사우를 팔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들이 매장을 만들고 상권을 형성했는데 그 첫 매장이 구하산방이었다고 한다. 

처음 일본인이 운영할 때부터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전국 각지의 보부상들이 구해온 붓을 한데 모은 유일한 가게였던 데다, 손님 각각의 특성에 맞춘 품질 좋은 붓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장사가 잘돼 조선은행, 미쓰코시 백화점 등이 있는 입지 좋은 명동으로 옮겼을 정도라는 설명이다. 

특히 구한말 조선의 왕들도 탁월한 품질을 알아보고 구하산방의 붓을 사용했다고 한다. 고종과 순종도 사용했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난 붓을 만드는 필방이라는 뜻이 담긴 ‘고순어용(高純御用)’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고 한다. 구하산방에는 이 말이 전서체로 쓰인 서예 작품이 걸려 있기도 하다. 안쪽 정면에 걸려 있는 ‘고순어용(高純御用)’이란 전서체 글씨는 서예가 정향 조병호(1914~2005)가 구하산방과의 60년 인연을 기념해 써준 글씨라고 소개했다. ‘고종과 순종도 즐겨 사용했다’는 뜻이니, 구하산방의 물건을 왕실 납품의 반열에 둔 칭찬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부유층을 상대로 고급 물품을 거래하는 상점은 대부분 일본인이 개업했다. 구하산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히로시마 출신의 가키타 노리오(枾田憲男)라는 사람이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한다. 가키타는 동양전통문화에 조예가 있는 상인으로, 부산에서 고급 지필묵 수입가게인 ‘구하당(九霞堂)’을 차렸고, 이 가게가 장사가 잘되자, 서울로 진출해 당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일대)에 지점을 낸 것이 오늘의 구하산방이라고 한다. 

해방 이후 가키타에게 가게를 물려받은 사람이 고미술상인으로 유명한 우당 홍기대(97)다. 홍옹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가 중국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하고 1935년 열네 살의 나이에 구하산방의 점원이 되면서 고미술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구하산방 초창기의 일은 우당의 회고록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 2014’에 잘 나와 있다. 우당의 회고에 따르면, 가키타가 부산에서 구하당을 연 것이 1920년 무렵인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구하산방의 개점 연도가 1913년으로 알려져 있다.
 

홍수희 대표.

■‘구하산방 모르면 문인이나 화가 아니다’
해방 이후 고미술상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우당 홍기대는 6·25 한국전쟁으로 도자기를 비롯한 수천 점의 고미술 수집품이 잿더미로 돌아가자, 명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구하산방을 옮겼다. 구하산방은 이후에도 낮은 임대료를 찾아 안국동, 견지동, 공평동 등지를 전전하다 2006년 현재의 인사동 네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구하산방은 우당이 고미술 거래에 전념하게 되면서 1972년 우당의 손아래 당숙인 홍문희에게 넘어갔고, 1987년부터 홍문희의 동생 홍수희가 운영하고 있다. 

구하산방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전문 지필묵 가게로는 서울에서 유일하다고 할 만큼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주 고객은 일본인들이었지만, 한국의 유명 화가, 서예가들도 애용했다. 우당의 회고록에는 초창기 구하산방의 고객으로 이당 김은호(1892~1979), 청전 이상범(1897~1972), 소정 변관식(1899~1976)과 같은 대가의 이름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해방 이후에는 홍성 출신의 화가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을 비롯해 도천 도상봉(1902~1977) 화백, 수화 김환기(1913~1974) 화백 등이 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위창 오세창(1864~1956), 구룡산인 김용진(1878~1968), 석정 안종원(1877~1951), 성재 이관구(1898~1991) 같은 한학자, 서화가들도 구하산방과 인연을 맺고 있다. 우당은 “구하산방은 전문가용의 고급 서화 재료와 고미술을 같이 팔았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구하산방을 모르면 문인이나 화가가 아니라는 말이 날 정도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한 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묵을 벗 삼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묵객’들을 위한 가게로 유명한 필방은 단순히 붓을 만들어 판매하는 가게를 넘어, 묵객들이 지성과 예술을 논하며 교류할 수 있게 한 구심점이었던 것이다. 

구하산방이 취급하는 붓은 1만 원 미만의 학습용 붓부터 추사 김정희가 사용한 붓으로 유명한 수백만 원짜리 최고급 서호필(쥐 수염으로 만든 붓)까지 2000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에서 손님에 꼭 맞는 붓을 추천하기 위해 홍 대표는 항상 필방을 방문한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다. 짧은 대화지만 손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손님의 성격, 추구하는 화풍이나 필체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2000여 종의 붓 중 몇 개를 골라 추천하거나, 중국에 위치한 필방의 붓 공장에 맞춤형 붓 제작 주문을 넣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100여 년 넘도록 필방을 이어온 비법이며 장수 가게를 운영할 수 있었던 비법인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업을 이으며 자리를 지켜온 장수 가게들을 서울시는 추억을 담은 미래유산으로 지정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우리의 추억이고 또 미래이기도 한 오래된 가게들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앞으로도 계속 전통을 이어갔으면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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