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에서 하늘을 감춘 한적한 암자’ 서산 천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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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길에서 하늘을 감춘 한적한 암자’ 서산 천장사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7.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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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4〉
서산 고북 연암산 ‘천장사’
천장암 앞의 7층 석탑(충남문화재자료 제202호).

내포문화숲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서산 고북면의 장요리 연암산 남쪽 마루에 자리한 조계종 제7교구본사 수덕사의 말사인 천장사(天藏寺)는 예사롭지 않은 절이다. 물론 찾아가는 길도 예사롭지만은 않다. 고북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나타나는 갈림길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가니 숨어 있던 절집이 나타났다. 천장암(天藏庵)이라 했으니 하늘이 숨겼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절로 들어가는 입구는 경사가 심해서 절이 숨은 듯하다. 도대체 이런 곳을 사람들이 왜 찾을까. 한국 불교의 성지이기 때문에 찾을 것이다. 천장사는 마치 제비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라 해 이름 붙여진 연암산(燕岩山)에 숨어 있는 작은 절집이다. 

‘천장(天藏)’이란 ‘하늘 속에 감춘다’는 뜻으로 장자가 물가에 매어둔 배를 온전히 숨기려면 산이나 들이 아닌 배에 숨겨야 했던 말과 통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천장사는 제비바위가 있는 산 중턱에 깊이 숨어 있어 하늘도 땅도 감추어진 곳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제비바위의 가파른 봉우리로 둘러싸인 좁다란 골짜기에 조성된 천장사는 이러한 산 계곡에 세워진 너무도 작은 절집이지만 이 집을 거쳐 간 큰 스님들로 인해 어느 곳보다 큰 사찰로 통한다. 천장사에는 근세에 이 땅에 선풍(禪風)을 불러일으킨 경허 선사가 일년 석달 동안 보림수행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1881년 6월, 연암산 천장암의 골방에서 치열하게 정진하던 경허 선사가 문밖으로 떨쳐나서면서 오도송을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 만공 선사가 이곳에서 불법을 계승한 사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경허 선사는 조선 말에 태어났으며 한국 불교를 개창했다는 대선사다. 경허의 제자를 흔히 삼월(三月)이라고 하는데 혜월, 수월, 만공(월면) 선사가 그들이다. 혜월 선사의 선맥은 운봉·향곡·진제로 이어졌고, 만공 선사의 맥은 전강·고봉·혜암이 받았다. 고봉 선사의 제자 중엔 해외에서 한국 불교를 알린 숭산 스님이 있다. 또 오대산 월정사를 지켰다는 방한암 스님도 경허 선사의 제자라고 한다. 불가에선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숙일 만한 선지식들이다. 경허 선사는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에 선원을 개설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스님들이 탁발을 해서 절에 먹을 것 좀 가져다주고, 자신이 먹을 걸 들여와서 여기서 공부했다고 한다. 산은 낮지만 숲은 아늑한 묘한 지세에 앉은 천장암은 한국 근대불교를 일으킨 경허 선사가 수도를 했던 곳이라 속세를 뒤로하고 공부에 전념하는 스님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수년 전 큰 산불로 인해 주위에 울창한 송림이 다 불타버렸다는 제비바위에서 눈을 돌려 바라보면 멀리 고북저수지가 눈에 들어오고 날씨 맑은 날에는 서해 앞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산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한 천장사는 이처럼 그 규모는 매우 작지만 선사들의 높은 뜻을 간직하고 있는 참선도량으로, 오늘도 사찰에서는 큰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바람소리를 헤치고 들리는 듯하다. 천장사의 연혁을 알려 줄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연혁을 알 수가 없다고 전한다. 

서산시청의 자료인 사찰 현황을 토대로 살펴보면, 천장사는 ‘서기 633년에 백제의 담화(曇和)선사가 수도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조선말에는 경허 선사가 수도하고 송만공 선사가 이곳에서 득도한 고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창건했다는 담화 선사가 누구인지는 밝히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삼국사기에는 거의 같은 시대의 신라에 담화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620년(신라 진평왕 42년)에 안흥법사가 황룡사에서 머물면서 번역한 경전인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받아 썼다고 한다. 또 천장사가 창건됐다는 633년의 다음 해인 634년(백제 무왕 35년) 2월에는 백제 흥왕사가 낙성됐고, 신라에서는 분황사가 낙성됐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한편 현재의 법당 앞에 있는 7층 석탑(충남문화재자료 제202호)이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장사가 조그만 암자로 석탑을 갖춘 채 고려시대 언제인가부터는 현재의 자리에 창건됐으리라고 짐작만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오랜 세월 동안의 연혁에 대해서는 유물이나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말기 이래로 선풍을 널리 떨친 고승인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9~1912) 스님이 천장사에 머물면서 수도하는 한편 후학을 지도했으며,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스님이 경허 스님의 제자로서 이 절에서 출가해 불법을 계승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1896년(건양 원년) 5월에 조성된 신중탱이 남아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천장암.

또 하나 사찰 입구 바위에는 ‘최인호 문학의 금자탑 ‘길없는 길’의 무대-천장암’이라는 표지가 있다. 과거 이곳은 천장암으로 불렸다. ‘이곳 연암산 천장암은 경허 대선사께서 18년간을 주석하신 정신적 도량으로 그의 수법 제자인 수월, 해월, 만공이 수행했던 곳입니다. 작가 최인호(1946∼2013)는 그 내용을 주제로 한 소설 ‘길없는 길’을 썼고, 이로써 천장암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전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듯 사연이 많은 절이 바로 천장사다. 이렇듯 내포문화숲길에서 만나는 고고한 수행자들의 향기가 순례자들을 감싸는 천장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불교라는 수행의 종교는 존재의식을 자각하고,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궁구하게 하며, 진정한 행복의 길(離苦得樂)을 제시한다. 불조의 진리가 넘쳐나건만 우리는 왜 그렇게 번뇌의 구렁에서 오늘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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