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문화숲길, 내포동학농민전쟁 최초 승전지 ‘승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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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문화숲길, 내포동학농민전쟁 최초 승전지 ‘승전목’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07.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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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에서 내포문화숲길의 역사와 문화를 묻다 〈7〉
④내포문화숲길 내포동학길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포동학군이 최초이자 유일하게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내포동학길 ‘승전목’

내포동학군 집결지·격전지였던 예산 관작리에‘동학공원’조성
 2012년 본격 복원사업 추진, 2020년 객사 등 복원사업 마무리
몽산, 나당연합군에 나라 빼앗긴 백제부흥전쟁의 전략적 요충지
승전목, 일본 정규군 무찌른 내포동학군의 유일한 승리로 기록

 

내포문화숲길에서 ‘내포동학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초이자 유일하게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승전목’과 무혈입성한 면천읍성의 전승로 옛길을 걸어볼 수 있는 내포동학 역사의 길이다. 최근 복원이 진행 중인 면천읍성, 풍악루, 군자정, 옛 면천초등학교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등 주변 문화자원과 몽산성길을 지나 승전목에 다다르면 이배산과 남쪽의 웅산 사이에 S자 모양으로 있는 좁은 협곡을 만날 수가 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이자 마지막 승전지인 ‘승전목’이다. 승전목 전승지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포지방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서로군 1지대가 전투를 벌여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이 승리한 기념비적 장소다. 이곳은 석산 개발과 도로 개설로 훼손된 승전목 전적지가 하루빨리 복원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해마다 승전목 승전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승전목 할애비 바위 앞 검안천 둔치에 장승공원이 조성됐다. 동학군의 집결지이자 격전지였던 예산엔 ‘동학공원(예산 관작리)이 조성됐다.
 

■ 2027년, 면천읍성·역사문화도시사업 완료
내포문화숲길의 ‘내포동학길’ 구간인 당진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서해안권 내포지역의 대표적인 정치, 군사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던 6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읍성(邑城)이다. 면천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당진에 앞서는 중요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예당(예산과 당진)평야의 중심에 있어 당진, 신창, 덕산, 예산을 잇는 교통의 중심 요충지였다. 당진은 서산, 태안 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면천읍성은 고려시대 충렬왕 16년(1290)에 세워졌다고 하나 실은 백제 초기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면천읍성은 동, 서, 남, 북의 사대문까지 갖춘 성이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다시 쌓았으며 경종 때 중수됐다. 면천에 읍성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1914년까지 당진에 버금가는 주요 군소재지였기 때문이다. 면천읍성은 1993년 12월 31일 충청남도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초기에 쌓은 전형적인 평지(平地) 읍성으로,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3235자(약 986m), 높이는 15자(약 4.5m)이고 적대(敵臺; 망루)가 7곳, 문이 3곳, 옹성(甕城)이 1곳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서쪽 성벽 일부의 성돌에 기미년(己未年)이라 새겨져 있는 것과 1439년(세종 21)에 이 성을 쌓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성돌에 새겨진 기미년은 이 성을 쌓은 연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면천행정복지센터, 보건지소, 노인정, 지금은 폐교된 면천초등학교 등을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 관방 시설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지금은 분명히 당진시 면천면인데, 안내판에는 ‘면천군(郡)’이라고 쓰여 있다. 그 이유는 조선 태종 13년에 면천으로 바뀌어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진군에 병합 될 때까지 읍내, 죽림, 덕두, 기화, 범천, 손동, 초천, 중흥, 감천, 송산, 승선, 정계, 마산, 송암, 함남, 합북, 비방, 이서, 신남, 신북, 현내, 창택 등 22개 면을 관할하던 군청소재지였기 때문이다.

당진시는 1999년 면천읍성 정밀지표조사를 시작, 2004년 서벽치성 60m를 정비했다. 2007년면천읍성 정비복원 기본계획을 수립,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해 2020년 중요 객사 등 복원사업을 마무리 했다. 충남도 지정기념물 제91호인 면천읍성은 면천 지역의 행정 중심지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 초기 돌로 쌓은 석축성(石築城)이자 평지성(平地城)으로, 축조 당시의 해안지역 읍성 연구의 귀중한 연구자료로 꼽힌다. 당진시는 면천읍성의 체계적인 복원을 위해 1999년 정밀지표조사를 시작해 서벽과 치성 60m 구간 정비를 2004년에 마친 데 이어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 선생이 면천군수 재직 당시 세운 것으로 알려진 건곤일초정도 2010년에 복원했다. 2012년에는 면천읍성 남벽 135m 구간과 남문(46.45㎡) 복원사업을 2014년에 마쳤으며, 2017년부터 성안마을 조성사업 추진, 2019년부터 서남치성 151m구간을 복원 2020년 완공했다. 면천읍성 복원사업은 2012년부터 10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추진, 객사 등을 준공했다. 2020년 문하재청 공모사업에 면천읍성 관련 사업이 선정되면서 오는 2027년까지 ‘면천읍성 역사문화도시사업’을 완료할 계획이다. 
 

■ 내포동학군 첫 승리, 면천승전목 전투
내포문화숲길의 ‘내포동학길’에서 만나는 면천군의 ‘몽산(蒙山,225m)’은 진산으로 면천읍성의 외곽 방어목적으로 석성인 몽산성이 있고 주변에 성황사 석굴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면천군 몽산석성조에 따르면 석성의 둘레가 543보이고 겨울이나 여름이나 마르지 않는 우물 2개와 군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빼앗긴 백제를 다시 일으켜 싸웠던 백제부흥전쟁의 전략적 요충지로 백제부흥운동의 중요한 역사와 면천의 유구한 역사문화를 올곧이 간진한 유서깊은 산이다. 진산에 변방 방비책의 일환으로 쌓은 몽산성과 면천읍성이란 두 가지 석성이 현재까지 존재 하고 있는 점은 역사성, 문화성이 풍부한 산성테마길은 그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다.

내포문화숲길에서 ‘내포동학길’구간은 1897년 10월 24일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이 일본 정규군을 무찌른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7년 정월에 발생한 전라도 고부(전라도 정읍)동학운동은 조선말 풍전등화와 같은 외세의 압력에 내환이라는 악제로 조정을 압박하는 사건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과 착취로 황폐해 가는 농민들을 자극해 탐관오리의 응징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주도한 근대적 항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척왜양이(斥倭攘夷)’의 기치 아래 모인 전국의 동학군은 40만의 대군으로 전라도의 전봉준을 비롯한 20여만 명과 호서지방의 손병희가 이끄는 20여만 명이 부정과 부패의 사슬을 끊고자 봉기했던 사건이다. 요원의 불길은 전라도와 충청도, 경기도 수원에 이르기까지 파죽지세로 조정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결국 조정에서는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정규군과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 일본군은 인천 제물포로 청나라의 원군은 충청도 아산만으로 들어온다. 당시 내포지방의 동학군은 예포의 박희인과 면천의 이창의가 이끄는 1만 5000여 명이 여미평(서산 운산면 여미리 앞 평야)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미 태안군을 장악한 이후라 충천한 사기로 열약한 무기 체계를 충분히 극복하고 있었다. 특히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이른바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게 되는데 많은 전투로 터득한 전력도 충분했다. 

당시 ‘승전목 전투’는 1894년 9월 28일 상부의 명령을 받아 10월 1일 내포지역 동학군들이 일제히 기포하면서 시작됐다. 10월 18일경 여미벌에 초막을 치고 유진(留鎭)하면서 태안·서산 등의 동학군들이 모여들어 24일경에는 수만 명이 집결했다. 이때 면천의 한명순(韓明淳)이나 이화삼, 당진의 박용태(朴瑢台), 김현구(金顯玖) 등 접주들이었다. 내포지역 동학군은 ‘승전목(勝戰谷)’으로 이동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승전목은 면천 사기소리와 당진 구룡리 사이 좁고 가파른 계곡의 협소한 지형이다. 구룡리에서 면천으로 가는 길에 이배산과 검암천이 흐르고 있고 우측에 높은 산이 굽은 형태로 있어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은 지형이다. 북쪽에는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용주봉인 이배산(離背山)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은 면천 삼웅리의 웅산(雄山)에서부터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으로 어떤 병력도 통과하기 어려운 요충지다. 189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면천을 출발한 일본 정규군 이까마쯔 소위가 이끄는 1개 소대와 2개 분대 관군 35명은 여미평 동학군을 해산하기 위해 사기소리에서 구룡리 방면으로 이동 중 깃발을 든 동학군 몇 명이 총을 쏘고 도망가 이를 쫓아가다 사전에 매복한 1만여 명의 동학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허를 찔린 일본 정규군이 참패한 전투로 기록된다. 10월 24일 사기소리에서 구룡리 방면으로 이동하던 일본군은 협로를 통과하면 통로가 열릴 줄 알고 후퇴 없는 전진을 계속하다 협공을 당해 1시간 만에 퇴각했는데, 서풍을 이용해 불을 질러 연기로 공격을 차단하는 화공을 병행하는 치밀한 작전을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무찌른 내포동학군의 유일한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이로써 갑오개혁의 서곡과 을사늑약의 단초를 제공한 의미도 있다. 동학군과 일본정규군의 전투 중 괴산의 애제전투와 당진의 승전목 전투가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로 남게 된다. 이곳은 역사·문화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경관도 아름답고 빼어난 곳이다.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내포문화숲길에서 ‘내포동학길’의 ‘승전목’이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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