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씻고 오르는 절, 천년고찰의 향기 ‘상왕산 개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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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씻고 오르는 절, 천년고찰의 향기 ‘상왕산 개심사’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6.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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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3〉
서산 운산 상왕산 ‘개심사’
충남 서산 운산면에 위치한 상왕산 개심사.
충남 서산 운산면에 위치한 상왕산 개심사.

충남 서산 운산면에 있는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는 적송으로 울창한 숲길의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개심사는 절 이름 그대로 ‘마음을 여는 절’이다. 백제가 멸망하기(660년) 불과 6년 전인 의자왕 14년, 서기 654년에 창건됐으니 1360년이 넘은 ‘천년 고찰’이다. 개심사를 품고 있는 주산은 상왕산이다.

상왕산은 차령산맥에서 뻗어 나와 주봉인 가야봉(677m)을 중심으로 원효봉, 석문봉, 옥양봉, 수정봉, 상왕산 등의 봉우리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이곳 산의 형상이 마치 코끼리 모양이며, 옛날 상왕(象王)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기에 ‘상왕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지금은 개심사 뒤편 북쪽으로 십여 리 남짓한 거리에 솟은 봉우리를 상왕산이라 하고, 개심사 남쪽으로는 석문봉(石門峰)과 이어져 가야사(伽倻寺) 옛터를 품에 안은 주봉을 가야산이라 하지만, 사실 가야산과 상왕산은 같은 산을 뜻한다고 한다.
 

상왕산 개심사 일주문.
상왕산 개심사 일주문.

개심사 일주문에 있는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란 현액의 글씨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스승이자 근대 명필로 알려진 해강 김규진의 작품으로, 그동안 해인사나 대흥사 등과 같은 사찰에서 보아온 작품과는 달리, 예서풍의 대담성이 돋보이는 글씨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개심사(開心寺)라고 쓴 현액이 눈에 들어오는데, 단아한 해서풍의 글씨가 두드러져 보인다.

사찰의 중심에 있는 큰 법당에 걸린 ‘대웅보전(大雄寶殿)’ 현액을 위시해 ‘심검당(尋劍堂)’과 ‘안양루(安養樓)’와 같은 현판들이 개심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개심사에서 푸근한 이미지를 더하는 것은 기둥들이다. 굽어 있고 배가 불룩하며 굵기가 저마다 다른데,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손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대로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개심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과 요사채(寮舍寨)인 심검당(尋劍堂,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8호)은 조선시대 초에 지어진 건물로 당시의 건축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백제의 것인데, 현존 건물은 1475년(성종 6) 산불로 소실된 것을 1484년(성종 15)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맞배지붕 건물로 차분한 분위기를 내는 대웅전은 밖에서 보면 기둥 사이로 공포가 놓인 다포계 건물로 보이나 안쪽에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놓인 주심포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건축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심검당의 건립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1484년(성종 15)에 중건된 것으로, 본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였지만 지금은 ‘ㄱ’자형의 방으로 늘려 상당히 큰 규모이다. 기단석 위에 자연 주춧돌을 올리고 배흘림이 가미된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기둥 윗부분에서 공포를 짜올려 지붕을 지탱하게 한 주심포 양식이다. 

개심사 사적기에 따르면 의자왕 11년(651)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하고 개원사(開元寺)라 하던 것을 1350년 처능(處能)이 중창해 개심사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향토문화대전’에는 개심사의 창건연대가 진덕여왕 5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덕여왕 5년은 의자왕 14년에 해당하므로 연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과 백제에는 국사(國師) 제도가 없었던 점을 들어 개심사의 창건을 고려시대 후기 웅진 출신의 수선사 제10세조였던 혜감국사 대(代)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의견을 적고 있다.

하지만 개심사가 위치한 상왕산의 북쪽에는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 있고, 남쪽에는 수덕사가 있는 것으로 볼 때 개심사의 창건을 고려시대 후기로만 볼 수도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창건연대가 백제시대인지 고려시대인지에 대한 설이 있지만, 개심사가 가지는 문화재적 가치는 백제도 고려도 아닌 조선시대 건축의 변혁이 가람에 드러나 있다고 주장한다. 개심사는 우리나라 절 중에서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 때 화를 입지 않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 고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들이 여럿 남아 있다. 특히 대웅전(보물 제142호)은 주심포에서 다포양식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개심사에는 조선시대 후기 영·정조 문화의 절정기에 그려진 아름다운 괘불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 영조 48년(1772년)에 제작된 이 괘불은 삼베 바탕에 석채와 당채로 채색된 불화로 길이 10.1미터에 폭이 5.87미터나 되는 거대한 그림이다. 석가모니 영산회상 장면을 그린 것인데, 화면을 꽉 채우는 석가모니상에 견주어 둘러싸고 있는 보살과 시중들은 매우 작게 묘사돼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색조는 전체적으로 녹색과 연지, 청색과 붉은빛이 어우러져 있어 밝고 장엄한 맛이 일품이라는 평이다. 괘불은 원래 사월 초파일이나 백중날 같은 불가의 큰 행사나 대중 법회가 있을 때 옥외에 걸리는 걸개그림을 말한다.

개심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봄의 벚꽃 개화와 함께 찾아온다고 한다. 개심사 경내에 피는 왕벚꽃과 청벚꽃은 탐스럽기로 이름이 나 있다. 개심사의 왕벚꽃은 꽃잎이 겹으로 돼 있어 일반 벚꽃을 여러 송이 묶은 것처럼 탐스럽다고 알려져 있다. 꽃이 백색과 연분홍, 진분홍, 옥색, 적색 등 다섯 가지 색을 띤다. 개심사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연한 연둣빛의 청벚꽃도 있다. 개심사에는 국내 유일의 청벚꽃나무가 자생하는데, 보통의 벚꽃이 연분홍인 반면 청벚꽃은 말 그대로 연두색이다. 더욱이 일본의 벚꽃과는 달리 겹꽃으로 꽃잎이 풍성해 그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뭐니 뭐니해도 개심사의 진면목이라면 무량수전을 지나 명부전 뒤에 있는 산신각에 올라 울창한 송림과 고목 사이로 바라보는 풍경일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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