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감해비리국’의 수도에 충남 행정수도 ‘관문’ 뚫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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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감해비리국’의 수도에 충남 행정수도 ‘관문’ 뚫리다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8.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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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1〉 - 홍북읍 석택리 ‘환호취락’유적

홍주일보사는 충남미디어포럼과 2022년도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연합사업)의 지원을 받아  마을공동체의 의미와 가치, 역사와 문화,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삶, 함께 만드는 희망이야기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톺아본다. 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 행복하고 희망이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스토리를 홍주신문 8월 4일 자(750호)부터 10회에 걸쳐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 영상으로도 담는다.  <편집자 주>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발굴조사 현장모습과 충남도청 진입도로 개설·내포신도시 조성 모습(2012년).

홍북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은 지난 2006년 충청남도 도청이전이 홍성 홍북과 예산 삽교읍 일원으로 결정돼 기반조성과정에서 도청이전 신도시와 예산수덕사IC를 연결하는 진입도로 개설공사 구간에 대한 문화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됐다. 당시 발견된 환호는 원삼국시대 환호취락 중 가장 큰 규모로 확인되면서 백제의 진출이 이뤄지기 전 홍성에서 마한 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명돼 관심을 끌었다.

석택리 ‘환호취락유적’이 위치한 홍북 일대는 용봉산에서 발원한 금마천이 남북방향으로 흐르고, 주변엔 충적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저구릉성 산지가 형성돼 있어 생활하기에 유리한 여건을 갖췄다. 특히 환호취락이 조성된 구릉부는 삽교천(금마천)과 신경천의 합수지점으로 하천이 이곳을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환호유적지에서 주변을 조망하기에 탁월한 위치이기 때문에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취락의 경우 구릉성 산지의 정상부에 환호를 경계로 한 중심 취락과 동으로 50m 떨어진 곳에 소규모 취락이 형성돼 있었다. 

결과적으로 마한시대에 홍북 석택리 일대가 마한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석택리는 마한의 중심지로 기능했지만 백제의 진출 이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곳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기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취락의 입지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고, 이중으로 구성돼 있는 환호를 통해 취락의 일면을 볼 수 있었으며, 환호 내에서 확인된 광장을 통해서 마한에서 제천의례 등을 행해 왔음을 확인했다. 석택리 유적이 위치한 홍북 일대 인근에서 백제 웅진·사비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이 발견됨을 볼 때, 석택리 지역 역시 백제의 중요한 거점으로 부상했던 곳이기 때문에 석택리 유적이 갖는 가치 또한 매우 중요한 고대 유적임에 틀림이 없다.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과 유적 밑으로 조성된 ‘충남대로’ 홍북터널과 내포신도시 전경(2019년).

■ 석택리 환호유적, 원삼국시대 환호 유적 중 가장 큰 규모로 원형이 잘 유지돼
한국사에서 마한과 백제는 일반적으로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라는 동일한 공간을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가지고 점유했던 정치체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 의하면 마한은 3세기까지도 존재했고, 백제는 마한 50여 나라 중 하나의 소국으로 백제국으로 불렸으며, ‘목지국(目支國)’이 마한을 대표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백제 국가 권력의 성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백제토기의 성립 등이 모두 3세기 이후로 비정되고 있으며, 금강 유역에서는 4세기까지도 원삼국시대의 물질문화와 전통이 계속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고학적으로 마한은 3세기까지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삼국지의 기록이 더 의미를 갖게 된다. 

결국 홍북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의 주거지와 분구묘에서 출토된 유물을 볼 때 존속기간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은 마한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공주대 정재윤이 논저에서 밝힌 이유다. 홍북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원삼국시대 환호유적 중 가장 큰 규모이고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홍성 고대사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석택리 환호유적은 환호를 중심으로 반경 50m 범위가 원형보존지역으로 지정돼 환호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가 전면 중지됐다. 따라서 환호취락의 전모는 물론 환호와 관련된 출입구, 망루, 저장시설 등은 풀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다.
 

■ 홍북 석택리 일대, 목지국·감해비리국의 수도였다?는 주장 제기돼
충남도청을 비롯한 충남의 대표행정기관이 소재하고 있는 홍북읍의 석택리 지역은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천년홍주(千年洪州)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삼한시대(三韓時代) 월산에 ‘월지국(목지국)’이 있었다면 마한의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의 수도는 홍북 석택리 환호취락지 일원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관심이 쏠린다. 발굴 당시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들은 석택리 환호유적에 대해 ‘마한 54개 소국 중 석택리 일대는 ‘목지국’과 ‘감해비리국’의 수도였거나 집단주거지였음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마한의 건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와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 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해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에 세운 나라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목지국’이라고도 한다. 목지국의 우두머리는 마한의 우두머리이며, 또한 진왕으로 추대돼 삼한(三韓)의 최고 우두머리였다. 홍북 석택리에서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뤘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 연맹의 형태를 유지했다고 여겨진다. 백제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로 이동했다고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마한의 잔존 세력은 해안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 자료협조=홍주성역사관

따라서 홍주(洪州)도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의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었으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고막부리현’으로 불렸고,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는 ‘지심주(支尋州)’라 해 9개 현을 관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려시대(高麗時代) 927년(태조 10)에 ‘운주(運州)’라는 기록과 함께 ‘홍주(洪州)’라 고친 기록이 나온다. 문헌 기록에는 1012년(현종 3)에 고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일부 학자들은 1018년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월산(月山) 또는 백월산(白月山)’에 마한의 최대강국인 ‘월지국’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홍주의 진산인 월산에 ‘월지국(목지국)’이 있었다면, 홍북 석택리에는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홍북 석택리가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의 수도(首都)였거나 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그곳이 바로 발굴된 ‘환호취락 유적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곳의 보존을 위해 충남도청신도시 진입도로 개설 당시 터널로 조성된 지금의 충남대로 ‘홍북터널’이다. 

결과적으로 충남도청신도시를 왕래하는 주 진입도로인 홍북터널은 환호취락 유적지인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의 수도(首都)를 짊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또 우연의 일치치고는 참으로 묘한 것이 충남도청이 대전에서 옮겨온 충남도청의 이전 시점이다. 

충남도청이 홍북과 삽교 일원으로 옮겨온 시점은 2006년 이전지가 확정됐고, 신도시와 청사건립 건설공사를 거쳐 2012년 말에 이전을 완료했다. 그 시점이 지명의 명칭이 ‘고려시대 운주(運州)라 불렸던 홍성을 ‘홍주(洪州)’라 고쳤다’는 기록이 나오는 ‘1012년으로부터 꼭 1000년만인 2012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홍주(洪州)라는 지명으로 바뀐 1012년으로부터 1000년이 되는 해인 2012년에 충남도청 등 충남의 행정기관이 홍주(洪州) 땅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이 그냥 우연의 일치만일까?

그래서 홍성은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 해 ‘천년홍주(千年洪州)’라 하고 있으며, 예산의 지명도 919년에 시작됐기에 지명역사가 1000년이 넘은 곳이어서 ‘충남도청 이전지가 홍성 홍북과 예산 삽교지역으로 결정돼 이전했는데, 이 두 곳 모두가 1000년 역사의 땅이다. 이곳 1000년의 홍주 땅에, 용봉산과 수암산의 품에 충남도청을 비롯한 행정기관이 이전함으로써 ‘충남의 행정수도’가 안겨 있는 형국이다. 그 관문은 홍북 석택리의 옛 마한 ‘감해비리국의 수도’를 짊어지고 미래발전을 향하고 있다.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 자료협조=홍주성역사관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 자료협조=홍주성역사관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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