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과 매향암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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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과 매향암각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8.0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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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9〉
당진 정미 은봉산 ‘석조여래삼존입상’과 ‘매향암각’
백성들의 염원을 담은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석탑’(보물 제100호·제101호).

내포문화숲길 동학길에 위치해 있는 안국사지(당진 정미면 원당골1길 188)는 당진에서 서남쪽으로 10km정도 떨어진 당진 정미면 수당리 원당굴 은봉산 중턱에 있는 절터이다. 안국사지 석불에서 서남쪽으로 500m쯤 채석장을 끼고 올라가면 1000여 평의 터가 남아있다. 안국사 터의 앞면은 돌로 축대를 쌓았고, 터 안에는 장대석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주춧돌 3개가 보인다. 이 주춧돌들은 자연석이 아니라 양각 형태로 잘 다듬어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빈터 한쪽에는 작은 옹달샘이 있고, 뒤쪽으로는 부속 건물이 있었을 듯한 터에는 기와 조각 등이 흩어져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미현조에 보면 ‘안국산에 안국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창건연대는 문헌에 나타나 있지 않아 분명치 않으나 백제 말엽 창건돼 고려시대에 번창한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언제 폐찰 됐는지는 알 수 없으며, 석불, 석탑, 석축, 배바위돌 하수구 등이 현존해 사찰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 터의 동북쪽으로 500여m쯤 아래쪽에 보물인 석불입상과 석탑이 서 있고, 뒤에는 배바위 매향암각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석탑
당진의 안국사는 고려 현종 21년(1030년)에 거란족의 침입으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지은 천년 호국사찰이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안국사지 경내에 위치해 있다. 

안국사에는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100호), 석탑(보물 제101호), 매향암각(충청남도지정기념물 제163호) 등이 있다. 삼존입상은 금당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삼존입상의 균형성을 흐트렸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입상 하부 1m가 복토된 상태로 있었다. 이렇게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무릎 아랫부분이 매몰돼 있었으나 지난 2004년 충청남도역사문화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불상의 발과 대좌가 모두 확인됐다.
 

매몰돼 있던 불상의 발과 대좌가 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
석조여래삼존입상 중앙 본존불상의 매몰돼 있던 발과 대좌가 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

석조여래삼존입상 중앙의 본존불상은 머리와 신체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대형 석불입상이다. 머리 위에는 화불이 장식된 보관을 착용하고 있으며, 보관 위에 방형의 보개가 있다. 본존불상의 이마에는 백호가 있는데, 백호 위에 또 다른 원형의 구멍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상호는 턱 부분에 약간 살이 올라있으며, 눈·코·입 등이 얼굴 중앙에 몰려 있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흘러내렸고, 목은 짧으며 삼도는 없다.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댄 채 복부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붙이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해 가슴에 대고 있다. 본존불상의 발 부분은 별도의 석재에 발가락을 표현해 조성했다. 발의 길이는 40㎝이며,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발과 유사한 상자 모양이다. 본존불상의 대좌는 3m가 넘는 자연 암반의 상면에 방형의 대좌를 선각의 방식으로 조성했다.

우협시 보살상은 머리에 인동당초문 형태의 초문(草紋)이 장식된 비교적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이마와 보관 사이에는 반원형의 머리카락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상호는 눈·코·입 등이 오밀조밀하게 표현돼 얼굴 중앙에 몰려 있다. 귀는 긴 편이며 귀 가운데를 한 가닥의 보발이 가로질러 귓불 부분으로 내려오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삼도의 아랫부분에는 목걸이 장식이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양 팔뚝에 팔찌(腕釧)가 새겨져 있다. 수인은 양손 모두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채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부착하고 있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다. 우협시 보살상의 대좌는 원형이며, 대좌 상면에는 발이 조각돼 있다. 대좌의 지름은 130㎝, 두께는 33㎝이다.

좌협시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파손돼 있으며, 현재 파손된 보관만이 몸통 위에 놓여 있다. 좌협시 보살상의 복부에는 리본 형태의 띠 매듭이 새겨져 있다. 좌협시 보살상의 모습은 수인의 손 위치가 다른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우협시 보살상과 동일한 모습이다. 좌협시 보살상의 대좌는 평면 방형이며 대좌의 크기는 90㎝, 두께는 43㎝이다.
 

매향암각(충청남도지정기념물 제163호).
매향암각(충청남도지정기념물 제163호).

■ ‘매향암각’ 미륵세상 기원 ‘매향의식’치러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기와와 막새기와를 통해 조성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지난 2004년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태평십(太平十)’명 명문기와가 출토됐다. 발굴단은 이 시기를 요(遼)의 성종(1021~1030) 연간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태평십’은 1030년(현종 21)임을 밝혔다. 안국사지에서는 막새기와가 단일 종류의 것만이 출토되고 있어 ‘태평십’명 기와를 안국사 창건기의 기와로 봐도 무방하다는 평가다. 따라서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여겨진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에서 주목되는 형식적 특징은 본존불상이 방형의 보개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는 고려 광종 대 조성된 불상에서 처음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등을 들 수 있다.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불상의 조성 배경은 ‘황즉불(皇卽佛)’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경우 광종 대 조성된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보다 형식화돼 있다. 불상이 제작된 11세기 전반에도 고려는 여전히 황제국 체제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조성 배경에도 ‘황즉불’ 사상이 반영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안국사지 ‘매향암각’은 미륵세상을 기원하며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에 매향목을 묻는 매향의식을 치르고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고려 후기 민중들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를 묻고 제를 지냈는데, 이를 통해 미륵 세상이 도래하고, 백성들의 삶이 평안하기를 바랐다. 이때 묻은 향나무는 오랜 세월이 지나 바다 위로 떠 오를 것이라 믿었는데, 이것을 ‘침향’이라고 불렀다. 

이 ‘침향을 말린 후 불을 피우면 이 세상 어느 향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고 해 불교에서 최고의 향으로 여겼다. 원래 침향은 동남아시아 등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향나무의 한 종류다. 하지만 당시에는 침향의 조달이 어렵고, 가격 또한 매우 높아 왕실과 귀족이 주로 사용했고 매향제에는 일반적인 향나무가 사용됐다. 매향제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시기인 14~15세기는 왜구가 창궐해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했던 시기다. 매향제가 불교기반 향촌농민조직인 향도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뤄진 것을 볼 때 ‘안국사지 매향암각’은 호국불교신앙인 미륵신앙과 전통신앙인 거석신앙이 결합한 결과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백성들이 매향제를 통해 이상적인 세상이 오길 바라는 미륵신앙에 기반해 종교적 구원을 염원했다면 전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하루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의 곡식이라는 구절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 해소 또한 간절히 염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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