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양주조씨’ 종가 ‘사운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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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양주조씨’ 종가 ‘사운고택’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9.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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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2〉
홍성 장곡 ‘사운고택’
홍성 장곡면 산성리의 내포문화숲길 백제부흥군길에 있는 사운고택과 학성산 전경.

내포문화숲길의 백제부흥군길에 있는 홍성 장곡면 산성리 309(홍남동로 989-22)에 위치한 사운고택(士雲古宅) 우화정(雨花亭)은 양주조씨 충정공파의 종가다. 양주조씨의 정착은 중추첨지부사 조태벽(趙泰碧, 1645~1719)이 낙향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조태벽(절충 장군)은 장남 조진석의 3남으로 홍주(홍성) 입향조이다. 사촌들의 추천으로 고향에서 가깝고 물 좋은 홍주 장곡으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조태벽의 고향 보령 청라는 오서산 남쪽이고 홍주(홍성) 장곡은 오서산 북쪽이어서 거리로도 40리가 채 되지 않는다. 

조태벽은 충정공(忠靖公) 조계원(趙啟遠, 1592~1670)의 손자이다. 조계원의 호는 약천, 자는 자장이며, 인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존성(存性)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의 사위가 되며,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문인이기도 하다. 또한 인조 계비인 장열황후(莊烈王后)의 작은아버지로, 1628년(인조6) 문과에 급제해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증직됐다. 후예 중 조중세(趙重世, 1847~1898, 자 사운)는 문경 현감으로 재직할 때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고자 홍주 본가의 양식을 실어다가 나눠 줌으로써 백성을 구제했고, 고종 31년(1894)홍주의병의 봉기에 군량미로 쌀 239두를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양주조씨는 우리 전통 미덕이라 할 수 있는 나눔의 정신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가문이 온전하게 이어질 수 있는 근원이 됐다.

당초 고택은 조환웅의 부친의 이름을 따서 ‘조응식 가옥’이라 불렸으며, 국가문화재 중요민속자료 198호로 지정됐다. ‘사운고택(士雲古宅)’이라 불리는 연유는 조환웅의 고종조인 조중세(趙重世)의 호가 ‘사운(士雲)’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름 ‘우화정(雨花亭)’은 ‘꽃비가 내리는 정자’라는 뜻으로 조선 영조 때 문신인 자하 신위(1769∼1847)가 이곳에 머물 때 지었다고 전해진다. 8명의 정승을 배출한 350여 년이 된 양주조씨 고택으로 조선말 동학농민혁명과 6·25 한국전쟁 등의 소용돌이를 겪었으나 무사히 넘긴 것으로 알려진다. 고미당마을의 학성산 아래 반계천(안내 간판은 ‘무한천’이라 잘못 적은 듯)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나직한 야산이 감싸고도는 남향에 자리한 고택이다. 18세기 중반 조선 후기의 전통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옥 고택으로 건축 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사운(士雲) 조중세(趙重世)는 문경현감 시절(1890~1892) 백성을 구휼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문경은 원래 농토가 적은 산골이어서 기근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더구나 기근이 들면 자체적으로 구휼미를 조달할 방법이 없는 가난한 고을이기에 조중세 현감은 자신의 본가인 장곡에서 곡식을 날라다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했던 것이다. 이에 문경 사람들은 현감의 고마움에 공적비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운(士雲)은 1894년(고종 31) 홍주의병이 일어나자 239두(斗)의 곡식을 군량미로 아낌없이 내놓았다고 한다. 구한말 어수선한 나라의 정세에서 의병을 위해 선뜻 선비가 곳간의 빗장을 푼다는 것은 사운(士雲)이 아니고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는 평가다.

사운(士雲)의 그러한 나눔의 정신은 다음 대에도 이어졌다. 1930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조원대(趙源大)가 이순신 장군 묘역 성역화 사업에 성금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나온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금을 내놓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조원대는 선대인 사운(士雲) 조중세의 뒤를 이어 나눔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특히 우화정은 6·25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사령부로 쓰였는데, 피난을 간 아버지 대신에 할머니가 집을 지켰음에도 화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는 조환웅의 할머니가 평상시 가난한 이웃들에게 곡식을 나누고 마을에 산모라도 생기면 반드시 쌀과 미역을 보내는 등 온정을 베풀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자 안채의 할머니가 사시던 방에 ‘보현당(寶賢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고 한다.
 


■ 백제의 왕을 기리는 옛 지명 지키는 고택
현재 ‘사운고택’의 주인은 12대째 대를 잇고 있는 후손 조환웅이다. 할아버지 조원대는 반계강습소를 설립해 지방교육에 힘썼고, 할머니는 어려운 이웃 임산부를 돌봐주는 등 이웃들에게 자기 일처럼 도움의 손길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동학군의 침탈이 없었고 6·25 한국전쟁 때는 할머니만 남겨두고 가족들이 모두 피난을 갔으나 집안이 무사했던 것은 일상생활에서 이웃들에게 소소한 베품으로 가득했던 선비 가문의 전통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태벽의 아들 조상빈(15대)은 하위관료였고, 조대현(18대)은 절충장군, 조병노(19대)는 지평현감, 조원희(21대)는 무과급제, 조중세(22대)는 문경현감, 조용호(23대)는 승지, 조원대(24대)는 참봉, 조응식(26대)은 교사를 역임했다. 조선은 학문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벼슬을 할 수 없던 시대였으므로 자손대대로 도학에 심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한평생을 농촌 부흥에 힘썼던 조환웅의 아버지 조응식(趙應植·1929∼2010)이 지은 ‘용진가’를 적은 노래비가 고택 앞 개울가에 서 있다. “학성산 정기로 반계천 맑은물 (중략) 검소와 근면을 행동에 옮기며 내 고향 일구자 (중략) 베풂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며(후략)”라는 노랫말의 의미는 ‘양주조씨 집안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함은 물론이고 선비의 정신과 역사를 지니고 베풂을 실천하며, 전통을 지켜내자’라는 뜻이란다. 사운고택 우화정은 한때는 본채만 99칸에 달하는 명문부호였으나 현재는 60칸 남짓이 남았다. 초입에는 520여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으며, 노신제를 지내던 나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친근하면서도 영험한 존재였을 것이다. 곁에는 250년은 족히 됐을 은행나무가 뿌리를 굳건하게 내리고 그 주변에는 숲으로 울창하다.

고택 안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에는 ‘얼방문(乻方門)’이라 적혀있다. 안사랑채는 안방마님을 위한 활동공간으로 안사랑채를 겸비한 고택이 많지가 않다. 여성의 권위가 살아있는 가풍을 보여 주고 있는 상징이다. 그러면 ‘얼방’은 무슨 뜻일까? 어라하(백제왕을 부르는 말)가 말의 근원이며 어른을 뜻한다. 특히 이 마을은 백제가 패망한 뒤 의자왕의 아들 풍과 부흥군이 660년 이후 3년 동안 머물렀던 주류성이 고택 바로 뒤편에 있어서 원래 고을 이름이 ‘얼방면(乻方面)’이었는데, 현재는 그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싶어 고택 안사랑채(안사람들의 손님이 왔을 때 머물 수 있도록 한 집)에는 ‘얼방원(乻方垣)’을 대문에는 ‘얼방문(乻方門)’이란 편액을 붙여놓았다고 한다.

여기서 ‘얼(乻)’이란 글자는 중국 옥편에는 없는 새로 만든 글자(於+乙)로 임금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얼과 혼이라는 말 가운데 얼이 이에 해당하는 말로 이는 백제의 혼이자 곧 겨레의 혼을 이야기하고 있다. 장곡면은 원래 오사면과 성지면, 얼방면으로 이뤄져 있었다. 얼방은 백제의 왕을 기리는 옛 지명을 기억하려는 의지임이 읽히는 대목이다. 특유의 선비정신이 배인 정신적 환희임에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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