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지명 탄생지·왕건 대민교서 반포현장 ‘무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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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지명 탄생지·왕건 대민교서 반포현장 ‘무한산성’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9.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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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3〉
예산 예산 ‘무한산성(예산산성)’
예산산성(무한산성)이 위치해 있는 산성산 전경.

내포문화숲길 백제부흥군길 5코스인 무한천을 따라 추사고택으로 가는 길이다. 무한천을 따라가다 보면 예산읍 산성리의 무한천변 들판 한가운데 아트막한 산이 보이는데 그 산에 ‘무한산성(無限山城)’이라 불리는 ‘예산산성(禮山山城)’이 위치해 있다. 이 산성은 신라 김유신의 둘째 아들 원술랑이 쌓았다고도 하며,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 군대가 임존성을 함락하기 위해 주둔했던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이 산을 주민들은 ‘산성산(山城山)’이라 하고, 안내판엔 ‘무한산(無限山)’이라 적혀있다. 이곳은 행정지명이 예산읍 ‘산성리’라는 점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2년) 오산현을 예산현으로 바꾸면서 예산지명의 탄생지이자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조선 시대 여러 문헌에는 무한성 또는 무한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무한천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1년여 앞둔 934년 5월 ‘무한산성(예산산성; 예산진)’에 행차해 새 시대를 맞을 백성들에게 새 희망을 전하는 대민교서를 반포한다. 대민교서를 보면 ‘내가 새 나라를 이룩하였으니… 죄 있는 자는 벌이 자손에게 미칠 것이며, 허물이 없으면 살아서는 영록을 누리고 … 자손에 이르기까지 우대하여 상을 가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이곳에서 반포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예산군의 지명탄생 1100년을 기념하면서 이 시기를 시작점(919~2019)으로 삼기도 했다. 또 조선 시대 초 태안지역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한 태종이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지면서 두 명의 왕이 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예산이며, 이곳 ‘무한산성(예산산성)’이다. 이곳은 또 1894년 관군이 전투를 벌이다가 동학농민군에 함락된 현장이기도 하다.

예산군은 지난 2018년 3월 13일부터 2019년 1월 29일까지 일정으로 이곳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예산(禮山)’지명탄생 1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정상부 일원 1855㎡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백제 시대 대형 석벽·초석건물지와 목곽저수조, 저장구덩이(고려시대 포함) 등 유구 53기가 출토됐다. 이로써 ‘무한산성(예산산성)’에서 예산 1100년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던 유구한 시간을 간직한 유적과 유물이 발굴된 것이다. 
 

■ 919년 예산(禮山)이란 지명이 탄생한 현장
‘무한산성(無限山城)’이라고 불리는 ‘예산산성(禮山山城)’은 예산읍의 서북쪽에 있는 무한천변의 넓은 평야에 나지막하게 솟아있는 낮은 야산에 흙으로 쌓은 둘레 655m의 성 터이다. 옛 기록에는 오산성(烏山城)이라 해 둘레가 2002척이라 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성을 서에서 북으로 감돌며 흐르는 무한천(無限川)이 천연적인 참호를 형성하며, 주변의 넓은 평야가 성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벽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높게 판축(版築)했던 듯하나, 지금은 높이 2.4m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성의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예산이 백제의 고산(孤山), 혹은 오산(烏山)이었던 점으로 볼 때 백제 시대에 이 지역의 중심적 성터였던 듯하다. 7세기에 김유신(金庾信)의 아들 원술랑(元述郞)이 쌓았다고도 전해져 오고 있으며,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이 당군을 맞이해 싸웠던 곳이라고도 전해오는 것으로 볼 때 백제 시대의 성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추정되고 있다. 성에서 서쪽으로는 당군을 유도해서 싸운 원벌리(자연마을명) 들판이 보인다. 이 성(城)은 일명 ‘마진산성(馬津山城)’ 또는 ‘예산 산성리산성(禮山山城里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예산은 백제 때 오산현(烏山縣)이라 했는데,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고산현(孤山縣)으로 개칭해 임성군(任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던 곳이다. 예산지역의 대흥은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 혹은 금주(今州)라 했고, 경덕왕 때 임성군으로 고쳤다고 알려져 있다.
 
예산읍 산성리의 무한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예산산성(禮山山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30호), 덕산면과 삽교읍에 걸쳐있는 수암산성(秀巖山城), 삽교읍의 상성리산성(上城里山城), 봉산면 당곡리의 천태산성(天台山城)·시동리 산성(侍洞里山城), 고덕면 대천리의 금후산성(金後山城) 등이 남아 있다. 예산산성은 백제 시대 지방성의 행정 중심지였던 주요 산성으로, 거점 기능을 했던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예산산성은 무한산성, 오산산성 등의 명칭으로 문헌 기록에 나오며 919년 8월에 예산(禮山)이란 지명이 탄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태조 왕건이 대민교서를 반포한 역사의 현장이며, 조선시대 태종이 행차했던 곳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8월 3일에 충남도지정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특히 ‘예산(禮山)’ 지명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역사적 고증장소로 그 가치가 주목되면서 2015년에 정밀학술지표조사가 실시돼 성 둘레가 965m, 6개의 건물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예산산성 발굴 추가 시굴지역 조사 후 전경.
예산산성 발굴 추가 시굴지역 조사 후 전경.

■ 건물지, 백제산성서 확인되지 않은 첫 사례
충청남도는 예산군과 함께 충창남도기념물 제30호인 예산산성의 국가사적 승격 추진 사업의 일환으로 성벽 축조기법과 축조 시기 파악을 위한 ‘예산산성 북성벽 축조 기법 확인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예산산성 성벽의 축조기법을 조사한 결과, 기존 백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성벽 외에도 백제 시대 이전의 환호유적 성벽 등을 확인했다. 예산산성에는 현재까지 대형 석벽 건물지와 목곽저수조, 초석 건물지가 각각 1기, 저장 구덩이 43기, 구덩이 4기, 고려 시대 저장 구덩이 2기, 아궁이 1기 등 53기의 유구가 조사됐다. 조사 결과 예산산성의 성벽은 흙을 층층이 다지는 기법인 판축으로 조성된 전형적인 백제 시대 토성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환호유적 일부도 발견됐다.

당시 백제 시대 대형 석벽 건물지와 목곽 저수조, 인각와(글자 도장이 찍힌 기와), 연화문 와당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왕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수준 높은 건축물과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로 예산군이 백제 시대 여느 지방의 성보다도 더욱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발굴 조사된 건물지와 저수조를 포함한 각종 구덩이에서 백제의 웅진∼사비시대를 대표하는 인각와(글자 도장이 찍힌 기와), 연화문 와당, 삼족기(세발접시), 승문(돗자리문) 토기 등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특히 대형 석벽 건물지는 그동안 백제 산성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았던 첫 사례여서 그 자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는 평가다. 석벽 건물지의 규모는 남북길이 약 27m, 잔존 동서 너비 약 3m이며, 내부 건물 구조는 정면 13칸, 측면 4칸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대형의 석벽 건물지는 산성 내에서 군사들의 막사, 또는 창고건물로 활용됐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건물지 내부의 모든 초석 하부를 지탱하는 적심을 흙 다짐한 적심토 조성 방식은 부여 시내와 공산성 내부 등 백제 왕성(王城)과 도성(都城)에서만 확인된 것이어서 예산산성의 건물지는 백제 시대 건물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목곽 저수조는 네 벽면과 바닥면을 1m 이상 두께로 점토를 채워 방수 처리하고 점토 내부에 가공된 목재를 결구해 저수조를 조성했으며, 산성 내 식수 기능을 담당하던 시설물로 현재까지 확인된 백제 산성 내 목곽 저수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편이다. 목곽 저수조는 먼저 남북 10.5m, 동서 11.2m, 깊이 5.1m로 굴착한 후, 그 내부에 1.2m 정도 두께로 네 벽면과 바닥 면에 점토를 채운 후, 내부에 목재를 결구해 저수조를 조성한 구조이다. 목곽 내부 저수조의 규모는 남북 6.2m, 동서 6.1m, 잔존 깊이 3.5m로 대형에 속한다. 현재 왕도에 위치한 성들을 제외하고는 지역의 산성에서 대형 석벽 건물지와 문자가 찍힌 도장기와(인각와), 연화문 와당 등 수준 높은 건축물과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전문가들은 밝혔다. 한편 산성 아래 국도변에는 ‘화랑의 묘(廟), 김유신장군 사당’이라는 안내 간판이 서 있다.

결국 무한산성·고산성·오산성으로도 불리는 예산산성은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의 대민교서 반포의 현장이자 조선 시대 태종이 다녀간 지정학적 요충지이며, ‘예산(禮山)’이란 지명의 탄생지이자 동학농민혁명 전투의 현장이고, 김유신 장군이 임존성을 함락하기 위해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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