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큰 연못이 있었던 ‘지동마을’ 일부 신도시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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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큰 연못이 있었던 ‘지동마을’ 일부 신도시 편입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9.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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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6〉 - 홍북읍 봉신리 지동마을

홍주일보사는 충남미디어포럼과 2022년도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연합사업)의 지원을 받아  마을공동체의 의미와 가치, 역사와 문화,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삶, 함께 만드는 희망이야기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톺아본다. 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 행복하고 희망이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스토리를 홍주신문에 10회에 걸쳐 소개하고 영상으로도 담는다.  <편집자 주>

홍북읍 봉신리 지동마을 전경.

홍북읍 봉신리(鳳新里)는 홍성읍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용봉산 남동쪽 자락 방향의 해발 50~60m의 구릉지 하단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609번 지방도를 따라 덕산 방향으로 가다가 옛 홍성여고 사거리를 지나면서 바로 봉신리(鳳新里)와 이어지며 연접해 있다.

고려 때는 홍주(洪州) 고을에 속했고, 조선 시대 초엽에는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에는 홍주군 홍천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동(梨洞), 신기리(新基里), 상산리(上山里), 지동(池洞), 봉소리(鳳巢里)의 일부를 병합해 봉소리(鳳巢里)와 신기리(新基里)의 이름을 따서 봉신리(鳳新里)라 했다. 봉신리는 용봉천(龍鳳川)을 사이에 두고 지동(池洞)마을과 이동(梨洞)마을 2개의 행정리로 구성돼 있다.

봉신리 ‘지동(池洞)마을’은 옛날에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리굴’이라고도 부르며, 지동마을 일부 지역이 충남도청신도시 건설에 따라 편입되면서 14세대 61명이 고향을 떠났다. 편입지역은 쇳대배기(큰말 서북쪽에 있는 2반 자연마을), 메네박골(신경리와 경계를 이루는 큰골 위쪽 골짜기), 큰골(쇳대배기에서 신경리 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 시목골(큰말에서 동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 등 31만 3543평이 도청신도시 부지에 편입됐다.

봉신1리인 지동마을은 낭떠러기, 쇳대배기, 큰말, 날근터의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됐고, 609번 지방도 봉신교를 기준으로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동마을과 지동마을 사이의 용봉천에는 1960년대 ‘봉신교’ 다리를 다시 놓았고, 지금은 충남내포혁신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지동마을을 중심으로 남동쪽에는 내덕리 서력마을과 요덕마을, 서쪽으로는 상하리 하산마을, 북쪽으로는 신경리 신리마을과 자경동마을, 북동쪽으로는 대동리 동방송마을과 연접해 있다.

봉신1리인 지동마을의 주요 지명을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4)’과 주민들에 따르면 낭떠러기는 자연마을 중 1반에 속하며, 쇳대배기 서쪽에 있는 자연마을로 땅떠러지가 된 곳이 있다. 현재 609번 도로 봉신사거리에 접해 있는 곳이다. 쇳대배기는 2반에 속하는 자연마을로 큰말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큰말은 3반에 속하는 자연마을로 쇳대배기 동쪽의 마을이다. 홍북 대동리 방향으로 군도 4번 도로를 따라가다 지동교를 건너서 왼쪽에 있는 마을이다. 날근터는 4반의 자연마을로 큰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동마을회관과 새마을창고가 있는 곳이다.
 

홍북읍 봉신리 지동마을 전경.

■ 청동기·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곳
지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마을에서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산포지가 야산과 경작지 등에서 발견됐다. 유물 산포지 일대의 지형은 용봉천과 금마천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표고가 50m 미만의 저구릉성 지대와 넓은 충적지가 발달돼 있어 유적의 입지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예산 동서리 유적과 같은 선진 청동기유물이 출토된 점에서 당시에 봉신리 역시 선진적인 청동기문화가 꽃핀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충남도청이전 신도시 부지에 포함된 곳인 봉신리 2반에 속하는 ‘쇳대배기마을’에 청동기시대 유물·유적이 있다는 지표조사 결과가 나와 주목되는 만큼 봉신리는 청동기시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봉신리 지동마을에 가장 먼저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은 평택임씨(平澤林氏)와 수원백씨(水原白氏)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남아있는 후손들이 많지 않아 구체적인 사연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각성바지 마을로 여러 성씨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홍성군 지명부’에 나타난 입향성씨(入鄕姓氏) 관계자료를 보면 ‘봉신리 평택인 휴암공 임선체 후예가 세거(鳳新里 平澤人 休菴公 林先體 後裔가 世居)’라고 기록돼 있다.

봉신리는 1980년대 용봉천에 제방을 쌓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경작지가 크게 확장됐다. 1970~80년대 들어서는 구릉지를 개간해 과수원과 목장을 하는 것이 유행했다. 지금도 지동마을 일대에는 대규모 목장과 농장이 있으며, 주민들은 대부분 벼농사를 생업으로 하고 있다. 특히 축산업인 목장은 충남도청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축산악취’ 문제가 민원으로 제기되는 경우가 많아 점차적으로 폐업을 하거나 이전하는 경우 등 지양되는 추세다. 농업도 벼농사 이외에 딸기농업 등 복합농업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복합농업은 1960년대 ‘영풍’이라는 기업에서 운영한 ‘영풍농장’이라는 농업회사가 지동마을에 들어오면서 기업식 농사방법으로 복합농업을 시행했다. 지금은 ‘영풍농장’ 전체 부지가 충남도청이전 신도시(충남내포혁신도시) 부지에 편입되면서 폐업을 했지만 ‘영풍농장’ 운영 당시에는 아침 9시에 일을 시작해 저녁 6시에 작업을 마치는 것을 원칙으로 30만 평 규모의 땅을 가지고 농장을 경영했다. 주로 과수원에서 사과를 많이 생산했다. 회사에서 직영할 당시에는 직원들도 지동마을에 많이 거주했으나 직영을 중단하고 임대형태로 운영하다가 부지 전체가 신도시에 편입됐다.

지동마을의 모습이 현대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60~1970년대 전후로 새마을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지붕개량과 마을 길을 넓히는 등 많은 발전을 했다. 1980년대 건립된 지동마을회관은 ‘큰말(3반 자연마을)’과 군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남쪽인 ‘날근터(4반 자연마을)’에 위치해 있다.
 

지동마을과 충남내포혁신도시를 연결하고 있는 봉신교의 모습.

■ 사금 캐던 ‘싸래기내’ 금방앗간 터도 있어
지동마을 새마을창고 사이에는 옛날 ‘금답광산터’다. 금답광산은 1970년대까지 운영됐다고 전해진다. 또 봉신리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1970년대까지 채금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용봉천 일대에 위치한 봉신리를 비롯해 중계리, 상하리, 내덕리에는 유명한 ‘사금광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8·15해방을 전후해 지동마을과 이동마을에는 50여 호가 거주했는데, 일제강점기 채금(採金)사업이 활발했을 때는 금광에서 일을 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와 그 가족들로 한때 인구가 크게 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마을에 정착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인부들만도 50~60명이 있었고 직원까지 1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선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방을 구하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금을 캐는 기계를 주민들은 ‘금배’라 불렀고, 채금선이 금마천의 지류인 용봉천을 뒤집어서 채취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봉신리와 내덕리 서력마을 앞을 흐르는 용봉천을 ‘싸래기내’라고 부르는데, 사금을 캐던 내(川)라는 의미에서도 ‘싸래기내’라 부르기도 하지만 ‘중계리 천승골에는 1000여 명의 스님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먹을 밥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쌀을 씻어야 했는지 쌀을 씻은 뜨물이 내려오면서 싸래기가 쌓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지동마을에는 고바위와 쥐산, 싸래기내에 얽힌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싸래기내를 쥐산과 고바위(고양이)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마치 쥐가 싸래기내로 싸래기를 주워 먹으러 가다가 괭이(고양이)가 앞에 버티고 있어서 가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금배에서 일했던 주민에 따르면 금배는 3교대로 24시간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하루에 “어린애 주먹만큼만 금이 나와도 수지가 괜찮다고 했는데, 어른 주먹만큼씩 금이 나왔다”고 한다. 사금 채취 이외에도 논바닥이나 들판의 흙을 캐서 금을 채취하는 ‘토금점’과 ‘석혈광’이라 부르는 금광이 있었다고 한다. 이동마을의 봉신교 근처에는 지금의 봉신슈퍼와 봉신식당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금광에서 채굴한 광석을 파쇄하는 ‘금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지금도 금광에서 파낸 돌을 찧던 방아가 있던 타라고 해서 ‘금방앗간 터’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지동마을의 신도시로 편입된 지역에는 내포신도시 첨단산업단지가 건설 중이다.
 

홍북읍 봉신리 지동마을 전경.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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