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암자가 있었다는 용봉산, 쥐산이 명당인 하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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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암자가 있었다는 용봉산, 쥐산이 명당인 하산마을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9.2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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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7〉 - 홍북읍 상하리 하산마을

홍주일보사는 충남미디어포럼과 2022년도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연합사업)의 지원을 받아  마을공동체의 의미와 가치, 역사와 문화,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삶, 함께 만드는 희망이야기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톺아본다. 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 행복하고 희망이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스토리를 홍주신문에 10회에 걸쳐 소개하고 영상으로도 담는다.  <편집자 주>

용봉산 아래 쥐산을 둘러싸고 있는 상하리 하산마을 전경. 오른쪽으로는 충남도청내포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다.

홍북 상하리 하산마을은 백제 때는 금물현(今勿縣)이었고,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다가 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 초엽에는 홍주군의 일부였으며, 1872년에 제작된 조선후기 지방지도 홍주목조에 의하면 홍천면 하산마을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홍천면 상하리(上下里)와 하산리(下山里)의 일부를 변합해 상하리(上下里)라 하고 홍북면(洪北面)에 편입됐다. 홍북면(洪北面)은 현재 충남도청신도시(충남내포혁신도시)가 조성돼 인구가 유입되면서 홍북읍(洪北邑)으로 승격, 충남도청소재지 도시로 변모했다.

홍북 상하리 하산마을은 홍성읍에서 예산 덕산 쪽으로 609번 지방도를 따라 봉신리 이동마을을 지나 봉신교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용봉산이 시작되는 자락의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봉신사거리에서 용봉초등학교 방향으로 진입하면 용봉천 뚝방 길과 용봉산 아래에 펼쳐진 마을이 하산마을이다. 하산마을 1반은 숲안과 안말, 2반은 뒷당미, 3반은 좁은매기, 4반은 용방치기다. 숲안은 용봉초등학교와 역굴 사이에 있는 마을이며, 안말은 숲안과 쥐산 사이 현재 하산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의 중심이며, 뒷당미는 쥐산과 솔미 너머 사이의 안쪽 고랑에 있는 마을이고, 좁은매기는 안말에서 용방치기로 넘어가는 고개의 참나무숲마을이며, 용방치기는 말무덤과 서냉댕이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좁은매기에서 용방치기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말무덤’이 있으며 ‘쥐산’은 아랫산 뒤 중앙에 위치한 해발 50m의 낮은 산으로 용봉산에서 내려다보면 모양이 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며, 이곳은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 늙은 쥐가 밭으로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다)’의 명당인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산마을 용봉초등학교 뒤쪽에서부터 시작돼 덕산 방향으로 길게 누에처럼 누워있는 용봉산은 곳곳에 불교 유적이 많이 산재해 있으며, 골짜기마다 붙여진 이름이 많은 만큼 전설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또 가마바위골사지, 빈절골사지, 빈절골 마애보살입상, 성낭골사지, 용방치기사지 등 옛 절터와 관련된 사지(寺址) 지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어 99암자가 있었다는 용봉산에 불교사찰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사라진 하산마을 ‘뒷당미 미륵불’은 봉신리 쪽으로 넘어지면 봉신리 지루골 처녀들이 바람이 나 마을을 나가고, 하산마을 쪽으로 넘어지면 하산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나 집을 나간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래서 장가를 못 간 하산마을 청년들이 밤중에 몰래 미륵불을 넘어뜨렸는데, 그때마다 지루골의 처녀들이 마을을 나갔다고도 전해진다. 용방치기사지 입구에는 150㎝ 가량의 ‘하산미륵불’이 서 있었는데, 2005년 3월 도난당해서 지금은 시멘트로 만든 기단 부위만이 하산마을회관에서 좁은매기를 지나 용봉산 옛 청소년수련원 방향 400m 지점 길가에 위치해 있다. 
 

■ 하산마을 일부 충남도청신도시에 편입돼
홍북 상하리 하산마을은 용봉산이 시작되는 산 아래 품에 안긴 마을이다. 충남도청이전 신도시 조성으로 하산마을 일부(봉신사거리에서 용봉산 입구까지)가 편입되면서 7세대 14명이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이주했다. 상하리 하산마을이 충남도청신도시에 편입된 면적은 11만 1537평이다.

상하리 하산마을에는 8·15해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40여 호가 거주했는데, 지금은 신도시 건설을 계기로 100여 호가 훨씬 넘는 실정이며 앞으로 계속해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하산마을의 충남도청신도시 편입지역 인근 연접지역에 음식점과 커피숍, 슈퍼나 종교시설을 비롯한 각종 상가 건물이 신축되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지만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도시계획의 미비로 난개발이 이뤄지고 있다는 평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로망이나 주차장 등의 체계적인 전략적인 도시계획의 정비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마을이다. 충남도청신도시(충남내포혁신도시)가 시작되는 마을인 만큼 홍성군의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도시개발이 필요하다는 요구와 목소리가 높지만 아직까지는 특별하고 전략적인 대책이 없어 보인다. 연간 수 만 명의 등산객들이 호서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봉산을 등반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리지만 이와 관련한 체계적인 대책과 전략 등도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라는 우려 섞인 여론이 지배적이다. 하산마을 대부분의 농가는 벼농사와 한우 등을 사육하고 있으며, 20여 농가에서는 딸기와 방울토마토 등을 재배하고 있기도 하다.

상하리 하산마을은 청주한씨(淸州韓氏), 평택임씨(平澤林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등의 성씨들이 세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고 있지만 청주한씨(淸州韓氏) 기(棋)가 한양에서 하산마을로 입향(入鄕)했다고 전해진다. 홍북 중계리에 1863년에 세운 한기(한기)의 묘비가 있으므로 적어도 1683년을 전후해 청주한씨들이 상하리 하산마을로 이주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하산마을의 평택임씨(平澤林氏)는 홍북 봉신리와 상하리, 홍성의 학계리와 소향리 등에 묘소가 산재해 있는데, 매년 10월 14일부터 소향리를 시작으로 선저들의 묘역을 돌며 시향을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10월 14일부터 22일까지 9일간에 걸쳐 시향을 지냈는데, 요즘엔 하루에 여러묘소를 다닐 수 있기 때문에 4일 정도면 끝난다고 한다. 하산마을 용봉산 자락의 용방치기에 9대조 묘소가 있어 10월 17일 시향을 지낸다.
 

홍북읍 하산마을 입구석.

■ 용봉산과 관련된 많은 전설 전해져
하산마을을 품고 있는 용봉산(龍鳳山)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마을이다. 용봉산 천승골 골짜기에서 하산마을 앞으로 흐르는 용봉천의 ‘싸라기내(싸래기내)와 쥐산의 전설을 비롯해 용봉산 장수에 관한 전설, 용봉산성과 노색시 바위 전설, 쥐산과 쥐에 관한 전설, ’고시레‘와 부엉이에 관한 전설 등에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용봉산 장수에 관한 전설은 옛날에 용봉산과 백월산에 장수가 각각 살고 있었는데, 이들 장수는 용봉산과 백월산 사이에 살고 있는 소향이라는 어여쁜 처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소향이라는 아가씨를 두고 경쟁 관계에 있던 두 장수는 어느 날 소향이라는 아가씨를 차지하기 위해 큰 싸움을 벌였다. 두 장수는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쉬지 않고 돌을 던지는 싸움이 일주일여 계속됐다. 점점 싸움이 치열해지니 용봉산 쪽에는 점점 많은 돌 들이 쌓였으며, 마침내 그렇게 치열하던 싸움은 백월산 장수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됐고, 결국 백월산 장수가 소향이라는 아가씨를 차지하게 됐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이후 백월산에는 돌이 얼마 남지 않게 됐고, 용봉산에는 수많은 돌 들이 쌓여 기암괴석으로 가득하게 됐다고 한다. 비록 싸움에서 지면서 소향이라는 아가씨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용봉산 전체가 기암괴석의 바위로 덮여 아름다운 바위산으로 변해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지금은 연중 수많은 등산객을 비롯해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또 용봉산성과 노색시 바위 전설인데, 옛날에 용봉산 기슭에 두 남매가 살고 있었다. 누나인 딸과 동생인 아들은 힘이 장사였는데 누나인 딸은 시집갈 나이가 훨씬 지났는데도 결혼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두 남매를 키우던 홀어머니는 어느 날 용봉산 산신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는다. 두 남매 중 하나만을 택하라는 명령이었다. 홀어머니는 고민 끝에 두 남매를 불러서 지금부터 시합을 해서 지는 쪽이 목숨을 내놔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누나는 용봉산 봉우리에 앞치마로 돌을 날라 성(城)을 쌓게 하고, 동생은 천리길인 한양까지 다녀오는 시합을 시켰다. 두 남매는 목숨을 걸고 시합을 시작했는데,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동생인 아들이 승리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딸인 누나가 쌓는 성은 완성 단계에 이르러 바위 돌 한 개만 얹어 놓으면 성은 완성된다.

이대로 가면 아들이 시합에 져서 목숨을 잃게 된다. 이때 어머니는 딸에게 쉬었다하라며 콩누룽지를 내밀었다. 딸은 한양 쪽을 바라보고는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앞치마의 바윗돌을 내려놓고 콩누룽지를 먹기 시작했다. 딸이 정신없이 콩누룽지를 먹고 있을 때 한양으로 출발한 아들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딸은 먹던 누룽지를 내던지고 옆에 있던 바윗돌을 들어 올렸다. 바윗돌을 들고 일어서면서 배에 힘을 주는 순간 설사가 나오면서 바위를 들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 사이 동생은 골인했고, 누나와의 시합에서 승리했다. 약속대로 누나는 목숨을 잃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딸은 후일 용봉사 뒤편에 있는 바위로 변해 부처님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억울하게 죽은 누나라고 생각해 ’노새악시 바위‘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동생도 목숨이 다해 저세상으로 떠났는데, 동생은 용봉사 아래쪽에 있는 바위가 돼 부처로 태어났다. 사람들은 ‘용봉사 마애여래입상’을 ‘남동생바위’라 불렀다.

용봉산 정상부근의 성(城)터 역시 누나가 쌓은 성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남동생은 말을 타고 다녀왔다는 얘기와 함께 한양에 다녀온 말이 지쳐서 죽자 말을 위해 무덤을 만든 것이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용봉산 정상의 성터와 용봉사를 사이에 두고 아래와 위쪽에 서 있는 ‘마애여래입상’은 오랜 세월 두 남매의 성(城)쌓기 전설을 간직한 채 오늘도 등산객을 맞고 있다. 이 전설은 용봉산에서 멀리 건너다보이는 예산 대흥산 임존성벽에 얽힌 ‘묘순이 바위’ 전설과 매우 닮은 사연의 전설이다.

한편 ‘쥐산’과 ‘고시레’에 얽힌 전설도 전해지는데, 지금의 용봉천인 ‘싸래기내’ 근처로 충청도 쥐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알게 된 고양이들도 용봉산 아래로 몰려들었다. 쥐들은 살생을 금하는 부처님 품 안까지는 고양이들이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절 아래로 몰렸고, 건너편에는 고양이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1970년까지 고양이들이 모여 있던 곳에 고양이를 닮은 바위가 있었는데 이를 ‘고바위’라 불렀고, 고바위 앞에는 조그만 방죽이 있었는데 이를 ‘고양이 방죽’이라 불렀다. ‘고바위’는 새마을사업과 농지정리를 하면서 ‘고양이 방죽’과 함께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용봉산 자락의 하산마을 들판 한가운데에 예쁘장하고 조그만 솔밭이 있는데 쥐들이 부처님 품 안으로 피해 들어와 모여 있던 산이라고 해서 ‘쥐산’으로 부르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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