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김좌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항일투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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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항일투쟁의 길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0.0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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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7〉
홍성 갈산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
청산리대첩의 영웅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지 전경.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백야로 546번길 12)에 있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는 김좌진 장군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본래 터만 남아 있어 황량했던 곳을 당시 이상선 홍성군수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해 복원한 곳이다. 생가터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됐으며, 가옥은 안채, 사랑채, 광이 따로 있고 앞면 8칸 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방 곳곳에는 액자에 김좌진 장군이 나온 사진과 신문기사, 자료 등이 걸려 있고 시골이라는 특색을 살려 황토와 기와로 지어 시골의 고택 풍경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마당 한쪽에는 우물과 장독대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밖의 마구간 안에 있는 모형 말은 실제 말로 착각할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

백야기념관은 2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는데 제1전시실에는 김좌진 장군의 탄생부터 만주 망명까지의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백야 장군의 집안, 호명학교 설립을 통한 애국계몽운동,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과 무장독립전쟁 준비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 최고의 업적인 청산리대첩에 대한 내용을 전시한 곳으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의 전투과정,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술, 무기편성 등이 상세하게 전시돼 있다.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 뒷산에는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백야사’와 ‘백야공원’이 조성돼 있다. 백야사는 한식목조와가로 총 24.37평의 규모이며 재실과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된 사당이다. 재실은 김좌진 장군이 와룡천(臥龍川)에서 무예를 연마했다는 의미로 ‘와룡재(臥龍齋)’라고 지었고, 외삼문과 내삼문은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는 의미를 더해 각각 ‘화룡문(和龍門)’과 ‘청산문(靑山門)’이라고 지었다. 백야사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사진과 함께 분향대가 마련돼 있어 분향할 수 있다. 매년 10월 25일, 청산리대첩 전승기념일에 맞춰 이곳에서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사당인 백야사.

■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김좌진은 고종 26년(1889) 안동김씨 집안에서 아버지 김형규와 어머니 한산이씨 사이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김좌진의 11대조는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문충공 김상용이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는 9촌 관계다. 김좌진 집안은 대대로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였다. 그러나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13세 때 형 김경진은 백부 김덕규의 양자가 돼 서울로 갔다. 그러다보니 편모슬하에서 김좌진이 실질적인 가장이 됐다. 하지만 김좌진은 서당에 다니면서도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연마했다.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김좌진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다고 전해진다. 동네에서 씨름 상대가 없었고, 맨주먹으로 대못을 박고, 방귀로 방구들을 깼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이러한 힘은 어머니 한산이씨로부터 물려받았다는 평이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어머니가 밤에 소피를 보면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동네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들들을 엄하게 교육 시켰다고 한다. 김좌진은 유년 시절 을사의병의 홍주 총수였던 김복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를 통해 민족정신과 계몽의식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15세 때인 1904년 해주오씨 오숙근과 결혼했고, 16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 30여 명을 해방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먹고 살만큼의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줬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육군무관학교 졸업과 관련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의 가문이 명문가인 안동 김씨로 상당한 재력을 지닌 지역유지라는 점이다. 1907년 고향에 돌아와서 충청 호서지방을 밝게 개화한다는 뜻에서 ‘호명학교(현 갈산중고교)’를 설립했다. 김좌진의 나이 불과 18세 때의 일이다.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상상하기 힘든 이런 파격적인 행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극치요, 공동체 의식의 숭고한 발현이었던 것이다.

김좌진은 고향 홍성에서 대한협회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09년에는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했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안창호·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하는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했다.

1910년 일제에 조선이 강점되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이때 김좌진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이창양행’을 설립해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립자금조달차 족친 김종근을 찾아갔다가 일제에 검거된다. 이로 인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투옥됐다. 이때 복역 중 훗날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만난다.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김좌진은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회’의 박상진 등과 친분을 맺고 활동하면서 독립군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장항일투쟁을 준비했다.김좌진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효과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북만주 길에 올랐다. 만주 일대에서 유격전을 하며 항일운동사업을 책임지던 이진룡이 일제에 붙잡히자 그 후임으로 1917년 조국 땅을 떠난 것이다. 이후 김좌진은 다시는 살아서 고국 땅에 돌아오지 못했다. 

김좌진은 수감 중에도 독립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김좌진은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투쟁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사나이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男兒失手難容地), 지사가 구차하게 살면 다시 때를 기다릴 것이다(志士潤生更待時)”

1919년에는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의 거두인 서일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사령부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3·1독립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는데,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진을 감행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부대는 북진하는 일본군을 급습하기로 했다. 북간도에서 조직한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이 됐는데, 당시 독립군은 훈련과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종교 측에서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김좌진을 초대한 것이다. 1920년 독립군 간부를 양성할 사관양성소를 설치하고, 졸업생을 중심으로 교성대를 조직했다. 교관으로는 이범석과 김규식을 임명했으며,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한 결과 1920년 9월 제1기 졸업생을 배출했고, 10월에는 이들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벌려 대승을 거뒀던 것이다.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와 10월의 청산리전투 당시 북로군정서 부대는 홍범도 장군, 최진동 장군의 부대와 연합해 대승을 거뒀다. 당시 독립군은 일본군에 비해 병사 수도 적고, 가지고 있는 무기의 화력도 약했다. 그럼에도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30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대승(大勝)을 거뒀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고의 업적으로 꼽히면서 백야 김좌진 장군의 노련한 전술운용과 체계적인 훈련, 풍부한 무장, 병사들의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 등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 해림시 산시진의 백야 김좌진 장군이 운영하던 금성정미소.이곳에서 배신자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백야 김좌진 장군은 만주지역의 독립군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피해 소련 자유시에 거주하고 있던 대한독립군단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 병사들이 사살당하는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이로 인해 대한독립군단의 세력은 많이 위축됐으며, 백야 김좌진 장군은 만주지역으로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고 신민부를 조직해 군사부위원장과 총사령관을 맡았다. 신민부 해체 이후 1929년 7월, 김좌진 장군은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백야 김좌진 장군이 중국 해림에 세운 금성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원인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김좌진의 나이 41세였다. 백야의 죽음은 민족의 죽음이었고, 이후 만주지역에서의 독립군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으며, 이와 같은 백야 김좌진 장군에 대한 상세한 내용 등을 장군의 고향 땅인 갈산의 ‘백야기념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는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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