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문화숲길 천주교순례길, 홍주순교성지 순교6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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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문화숲길 천주교순례길, 홍주순교성지 순교6터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0.2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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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9〉
충남 홍성 ‘홍주순교성지 순교 6터’
홍주천주교순교성지 천주교순례길 이정표와 조양문.

내포문화숲길의 내포천주교순례길인 홍주순교성지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고 있다. 내포천주교순례길에는 홍주천주교 순교성지를 비롯해 여사울성지, 솔뫼성지, 신리성지, 배나드리성지, 해미순교성지 등 내포지역의 박해와 순교성지가 잘 연결돼 있다. 이렇듯 충청도 서부의 내포지역에는 순교지와 교우촌 등 천주교 성지가 많은데, 특히 홍주로 불리는 내포지역의 중심지인 홍성의 경우 홍주성 감영 터를 비롯한 순교성지가 많은 곳이다. 인근의 예산 신암의 여사울성지, 당진 합덕의 솔뫼성지, 신리공소와 합덕성당, 신평성당, 서산 해미의 천주교 순교지, 아산의 공세리성당 등 관련 유적지가 집중돼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이존창에 의해 현재의 충남 서부지역인 홍주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기도 했다. 홍주지역은 1839년 기해박해에서 1866년 최대·최후의 병인박해까지 베르뇌, 페레올,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등 파리외방전교회 계통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선교의 중심지가 됐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목(洪州牧)을 두고 목사(牧使, 정3품)가 주재했던 홍주는 예로부터 교통, 체신, 행정의 중심지요, 국방의 요새지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전해지고, 많은 교우들이 있던 중심이었다. 홍주순교성지는 홍주 토포청(종 3품의 영장 겸 토포사 관할)에서 파견된 포교와 포졸들에 의해 끌려온 순교자들이 갖가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했던 대표적인 곳이다. 그 장소는 목사의 동헌으로 목사가 집무를 보던 근민당과 홍주진영의 동헌, 즉 토포사가 겸하던 전영장(前營將)이 집무를 보던 동헌인 경사당 앞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중에서 근민당은 현존하는 목사의 동헌인 안회당(사적 제231호, 현 홍성군청사 내)이 아니라 그 서쪽에 있던 사달정(四達亭; 옛 정사당·政事堂)의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조양문)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실상을 찾아내고 진실을 밝혀 홍주성 복원과 함께 홍주천주교 순교성지를 체계적으로 복원해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홍주순교성지에는 여섯 곳의 순교터가 있다. 홍주성 복원과 함께 성역화를 통해 홍주천주교 순교성지의 부활을 꿈꾸는 이유다.
 

순교 1터인 ‘신앙증거터 목사의 동헌, 홍주동헌’은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은 내포지역을 관장했던 홍주목사가 머물던 곳으로 근민당이고도 부르는데, 홍주의 순교자들이 잡히고 끌려와서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던 장소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고문과 문초를 받았던 곳이다.

홍주성 안쪽에는 홍주목의 정문이었던 홍주아문과 오관리 느티나무, 홍성군청 본관을 지나면 조선 시대 동헌이었던 안회당을 만날 수 있다. 안회당 앞에는 물 위의 정자인 여하정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한편에는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곳이다. 본래의 동헌(근민당)은 현존하는 동헌(안회당)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동헌이 있었던 근민당 자리에는 신앙증거터를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천주교 박해시대 때, 천주교 지도층 신자들이 끊임없이 가해지는 곤장과 주뢰형(周牢刑)을 신앙으로 극복했던 곳으로 순교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배어있는 곳이다. 

순교 2터인 ‘홍주감옥, 감옥 터’는 홍주성내에 자리한 홍주감옥은 충청도의 첫 순교 터이며, 이곳은 복원이 돼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재현돼 있다. 홍주감옥은 1872년 제작된 홍주지도를 통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었음이 확인돼 홍주성역사공원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됐다. 
 

순교2터인 홍주감옥.

감옥 터는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인 원시장 베드로가 동사(凍死)로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순교자들이 굶주림과 목마름, 교수형, 장살형, 질병 등 다양한 형태로 죽어간 곳이기도 하다. 감옥 터 옆에는 우물터가 남아 있는데, 우물터 앞에는 원시장 베드로가 홍주감옥에 갇혔다가 옥중세례를 받고 1792년 추운 겨울 동사(凍死)한 순교 터로 우물터 옆에 원시장 베드로와 관련된 조형물이 조성돼 있다. 

홍주감옥은 천주교 박해 기간(1791~1869) 동안에 희생당했던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113명의 순교자가 탄생된 곳으로 이곳에서 교수형이 제일 많이 집행됐다고 전해진다. 홍주감옥은 프랑스 선교사로 첫 번째,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뎅 신부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관아에 자수해 머물던 곳이기도 하며, 성 다블뤼 주교와 성 오메트로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루 등 6분의 성인들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순교 3터인 ‘신앙증거 터 진영장의 동헌, 홍주진영’은 홍주성을 지키던 군인이며 죄인들까지 다스렸던 진영장이 머물던 곳으로 당시 진영을 관장하던 진영장(정3품)은 군사권과 죄인을 잡는 토포사의 직임을 겸하고 있었다. 홍주성 4대문 중 가장 중심인 조양문(東門) 바로 앞쪽에 위치해 있으며, 천주교 박해 후기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홍주진영으로 끌려와 이곳에서 가장 많은 고문과 박해가 있었으며, 가장 많은 피를 흘렸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홍성읍내 중심가 길 한복판에는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이 있는데, 홍주성의 문루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문으로 조선 시대 1870년(고종 7)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다. 1906년에는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며, 일본인들에 의해 홍주성의 서문과 북문은 파괴돼 없어졌지만 조양문은 홍성군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지킬 수 있었다.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해 다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조양문 주변에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순교3터인 진영장의 동헌.

순교 4터인 ‘신앙증거 터 저잣거리’는 홍주진영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신앙증거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 홍주성 안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으로 가장 번화했던 저잣거리(장터)다. 저잣거리는 장이 서던 곳으로 지금의 시장을 말하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이유로 조리돌림을 했던 곳이며, 순교자들도 관아로 끌려갈 때나 처형되기 전에 이곳에서 조리돌림, 침 뱉음, 돌팔매질 등의 조롱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순교 5터인 ‘순교 터 참수 터’는 북문교 건너 오른쪽 방향의 월계천변에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홍주의 처형지로 이용돼 온 곳이며, 일반적인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이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였기 때문에 참수 터로 이용됐다. 천주교 신자로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복자 황일광 시몬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고, 병인박해 당시에는 유마르타가 참수형을 받은 자리다.

순교 6터인 ‘순교 생매장터’는 홍주의사총과 인접해 있으며 참수 터에서 대교공원을 따라 걷다 보면 십자가의 길을 만나게 되는데, 생매장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천주교 4대 박해 중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 때 많은 내포의 천주교인들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자 그 대응책으로 일부 천주교 신자들을 생매장한 곳으로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로 가장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서 죄인들을 생매장하거나 시신을 이곳에 버리기 적합한 장소였다고 한다. 이렇듯 내포문화숲길 천주교순례길에서 만나는 홍주순교성지 여섯 곳의 순교 터는 홍주지역에 박해가 시작되고 나서는 내포의 많은 신자들이 전국으로 피난을 감으로써, 조선 땅 전역에 천주교가 퍼져나가게 된 계기가 됐던 상징성을 보여주는 곳이다.
 

홍주성지순례길 생매장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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