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장서운동’ 104돌, 홍주 유림대표 국제법에 ‘독립’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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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운동’ 104돌, 홍주 유림대표 국제법에 ‘독립’ 호소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3.0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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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32〉
  • 대교공원의 파리장서운동기념비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대교공원에는 일제의 침략상과 조선의 실상을 국제적으로 호소한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기리기 위한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가 세워져 있다.

홍주의병장 출신 김복한 등 유림 대표가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던 1919년 3월 29일에 맞춰 지난 2007년 3월 29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파리장서기념비는 지난 2005년 12월 착공, 지난 2006년 12월 9일 준공됐다. 기념비는 좌대(座臺) 0.72m, 비신(碑身) 2.67m, 갓석(石) 1.05m, 높이 4.5m로 뒤편에는 병풍석과 안내표지가 설치돼 있고, 파리장서의 원문과 건립취지문, 함께 청원한 137명의 명단이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한 137인 가운데 기호유림 대표 김복한 등 홍성지역 유림 4명을 비롯해 인근 내포지역에서 모두 17명의 유림이 서명했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를 설립한 당시 이종건 홍성군수는 “오늘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파리장서를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지 88돌이 되는 뜻깊은 날로 충절의 고장 홍성에 자랑스러운 파리장서비를 세움으로써 그 뜻을 후세에 전달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파리장서운동기념비는 1972년 10월 서울 장충단공원에 처음 세워졌고, 1977년 경남 거창, 1997년 대구, 2006년 충남 홍성, 2007년 경남 합천, 2014년 경북 봉화, 2017년 3월 경남 김해, 2018년 3월 경남 산청 남사예담촌 등의 지역에 건립됐다.

올해(2023년)는 ‘3·1독립운동’ 104주년의 해이면서 유림독립운동이라 불리우는 ‘파리장서운동’ 104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현들의 우국충정으로 일제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우국지사들의 끊임없는 항일투쟁의 독립운동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내용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운동 중 하나가 파리장서운동이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월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쳐버린 유림들이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하고자 1919년 김창숙 등 영남유림과 김복한 등 호서유림 등을 중심으로 전국의 유림들이 2674자에 달하는 대한제국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해 이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보낸 유림독립선언 또는 제1차 유림단 독립운동이라 불리는 독립청원운동이다. 이를 주도한 유림 50여 명이 일제로부터 옥고를 치르는 등 탄압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서 서명에 기회를 놓친 영남 유림은 유림계가 참여하지 못했음을 크게 한탄했는데, 김창숙 등이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빠졌으니 국제 활동의 서명은 유림에서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19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국제여론을 조성하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호서지방의 유림 대표 김복한 등도 별도의 청원서를 작성하는 등 전국의 유림들이 호응하면서 진행됐다.

3·1운동 이전에 유림들은 왕정복고와 전통적 관념을 유지하려 했으나 3·1운동을 계기로 영남의 유림 대표 곽종석(郭鍾錫)과 호서(湖西)의 대표 김복한(金福漢)을 비롯한 전국 유림 대표들, 특히 대부분 의병(義兵)에 참여했던 유림 대표들 137명의 연명으로 혈서와 같은 독립청원서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호서지방에서는 호서의 유종(儒宗)인 김복한을 중심으로 대부분 홍주의병(洪州義兵)에 참여했던 김복진(金復鎭), 안병찬(安炳瓚), 김봉제(金鳳濟), 임한주(林翰周), 전양진(田穰鎭), 최중식(崔中軾;中式) 등에 의해 초안이 작성됐으나 이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핵심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의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림의 독립운동은 3·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돼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계와 불교계가 주동이 된 운동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은 대대적인 장서운동으로 이에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유림들이 3·1독립운동 발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장서운동을 일으킨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나는 3·1독립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왕정복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동참하는 것이 한국 유림의 전통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점, 다른 하나는 신학문을 배우며,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한 명분론 때문이었다. 

파리장서의 내용 요지를 살펴보면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교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으나 우리는 역사적 전통과 역량이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이 있다. 따라서 인간과 만물의 독립생존원리(獨立生存原理)와 만국평화회의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민족자결원칙(民族自決原則)에 입각해 우리 민족에게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것이며, 특히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와 고종의 시해, 한국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 장서의 핵심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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