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 동편 오보(五步) 밖에 애도비(哀悼碑) 원형을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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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동편 오보(五步) 밖에 애도비(哀悼碑) 원형을 묻어’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3.19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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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34〉
  • 홍주성 ‘병오항일의병기념비’

지금의 홍성은 고려 초까지 운주(運州)로 불렸다. 운주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고을’이란 뜻으로 고려 태조 왕건은 운주 전투에서 승리한 뒤 충남 서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의 땅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여 전인 고려 현종 때 홍주(洪州)로 이름이 바뀐 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홍성(洪城)으로 강제로 바꾼 이후 1941년 10월 1일 홍주면(洪州面)이 홍성읍(洪城邑)으로 승격할 때까지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유지하며 충청도 서부지역의 행정·국방·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청도에서는 내포 땅이 가장 좋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기도 한다.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포구지역(안개)을 뜻하는 내포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홍성을 비롯한 서산, 당진, 예산 등 10여 개 고을을 말하는데, 이곳의 중심이 홍주(洪州), 바로 지금의 홍성이다.

이 같은 물질적 풍요로움은 역사적으로 저항의 기반이 됐다는 평가다. 시대별로 저항의 대상은 달랐지만, ‘충(忠)’과 ‘의(義)’를 뜻하는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홍주(洪州)는 호서의 거읍(巨邑)이고 그 땅이 넓고 기름지며, 그 백성이 번성하여 난치(難治)의 고을로 불려왔다’고 적고 있다. 이런 홍성을 둘러보면 곳곳의 홍주(洪州)란 지명에 익숙해진다. 1000여 년을 이어온 홍주(洪州)라는 지명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

홍주성에는 홍주의병과 관련된 유적지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홍주성의 서문인 경의문(景義門)과 북문인 망화문(望華門), 남문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훼철됐고, 홍주의병들과 일본군이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일본군 사상자들이 발생했던 조양문(朝陽門)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홍주성의 남문인 홍화문(洪化門) 근처에는 이청천이 글씨를 쓴 ‘병오항일의병기념비(洪州丙午抗日義兵記念碑)’가 서 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해 1906년 항일의병이 일어나 당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홍주성을 탈환했지만,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홍주성을 점령했던 의병들의 영웅적 항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가 ‘병오항일의병기념비(丙午抗日義兵記念碑)’다.

이 비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1906년 5월 홍주의병에게 도살된 일본군과 그들의 앞잡이가 되었던 매국노들을 애도하기 위한 ‘애도비(哀悼碑)’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항일의병 당시 죽은 친일관군과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1907년 매국노의 일원이었던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이 시를 짓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이 글을 쓴 비석인 ‘애도비(哀悼碑)’는 36년 동안 우리 민족의 민족적 분노의 대상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는 1948년 ‘애도비(哀悼碑)’를 없애고 그 자리에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다. ‘애도비(哀悼碑)는 비석 동편(東便) 오보(五步) 밖에 땅을 파고 원형(原形)대로 지하에 묻었다’고 ‘홍양사(洪陽史)’ 등에 전해지고 있다. 왜 그랬을까? ‘병오항일의병기념비’ 참배객들이 밟고 서는 그 자리에…? 그곳에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는데, 당시 홍성군수였던 김재항(金在恒)의 협조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홍성지부장 손재학(孫在學)이 군내 30여 인사들의 성금으로 세웠다. 1948년 5월 30일 제막식과 41주기 추모식을 엄수했는데, 이 자리에는 부여, 서천, 보령, 청양 등지에서 유족들과 기관장, 사회단체에서 참석했다. 중앙에서는 신익희, 엄항섭, 안재홍, 박봉애, 박순천 등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은 병오항일의병 당시 전사한 수백 명의 의병군 유골이 임시매장됐다가 해방 이후 분묘를 조성해 ‘홍주구백의총(洪州九百義塚)’이라 했다가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다. 매년 6월 1일 의병의날에 제향을 지내고 있으며, 묘역 옆에는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丙午殉難義兵將士公墓碑)가 있는데, 정인보(鄭寅普)가 글을 짓고 심상직(沈相直)이 글씨를 썼다.

의병(義兵)이란 정의를 위해 일어난 민간인 군대라는 뜻이다. 한말 의병의 의(義)는 정의와 충의의 의(義)이며, 동시에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의(義)이다. 한말 의병은 정의심과 충의정신에 입각해 개화정권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고, 동시에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에 대한 항쟁으로 민족주의 의병으로 발전했다. 홍주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의 참여층은 지휘부와 병사층에 따라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됐으며, 지휘부는 주로 관료 출신의 양반 유생 또는 재지 유생으로 구성돼 있었다.

충남의 의병은 전기의병과 중기의병에 있어 일본을 상대로 한 전직 관료를 포함한 유생을 중심으로 홍주, 유성, 당진 등이 중심이 됐으며, 특히 홍주성전투에서 많은 유생들이 전사했다. 홍성에는 홍주의병이 순국한 유해를 모신 홍주의사총(사적 제431호)과 병오항일의병기념비, 홍주의병기념탑,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 등이 있다. 1949년부터 매년 6월 1일(의병의날)에는 홍주의사총에서 병오 홍주 장사공 순위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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