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이몽학 난 평정한 ‘청난5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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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이몽학 난 평정한 ‘청난5공신’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4.0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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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36〉
  •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

홍성의 진산인 백월산(白月山)은 예로부터 홍주목(洪州牧)의 진산(鎭山)이고, 주산(主山)이다. 옛 홍주목(洪州牧)의 진산(鎭山)이고, 주산(主山)인 백월산(白月山)은 홍성에서는 ‘백월산(白月山) 또는 일월산(日月山), 월산(月山)’ 등으로 불리고 있다. 다만 일월산(日月山)은 백월산(白月山)의 ‘백(白)’자를 ‘일(日)’자로 본 오기(誤記)라는 견해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월산은 홍주목의 서쪽 3리에 있는 진산(月山 在州西三里 鎭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국여지지’에도 “월산은 홍주목의 서쪽 3리에 있는 진산(月山 在州西三里 鎭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한편 ‘여지도서’의 ‘충청도 홍주 산천’조에 의하면 “백월산은 오서산맥으로부터 흘러와 홍주목의 주산이 되고, 오서산은 홍산의 백월산으로부터 와서 홍주, 결성, 보령의 3읍의 경계에 특별히 솟아오른 산(白月山 自烏棲山脈 流來 爲邑主山, 烏棲山 自鴻山 白月山 來特立 於洪州結城保寧 三邑之界)”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동국여지지’에서의 ‘월산(月山)’이 ‘백월산(白月山)’으로 표기되며 주산(主山)으로 등장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65호, 1984. 5. 17 지정)는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산1(홍덕서로 185-21)에 ‘홍주청난사(洪州淸難祠)와 함께 세워져 있다. 처음에 이 비는 신사(1641년, 인조 19) 십이월 홍성읍 대교리 55-6(말무덤 또는 금마총 옆)에 세워졌는데, 2000년대 들어 장항선철로 선형직선화 공사와 홍성~예산 간 국도 21호가 확장되면서 현재의 백월산의 동쪽 계곡인 산혜암 입구로 2007년 12월 28일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는 홍가신(1541∼1615)이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후,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워놓은 비이다. ‘이몽학의 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중에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된 틈을 타서 이몽학이 조동이 돼 일으킨 반란이다. 왕의 종친이면서 왕실의 서자인 이몽학이 1596년 7월 6일 1000~2000명의 반란군과 함께 홍산현을 습격하면서 난을 일으켜 홍산, 임천, 정산, 청양 등 6개 고을을 함락하고, 9일에는 대흥을 함락한 이후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홍주성으로 진격했다. 당시 반란군은 수천 명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홍주목사인 홍가신이 무장 박명헌, 임득의, 신경행과 합세, 지역 관군과 연합해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 토벌하고 위기의 조선을 지켜냈다.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이몽학은 관군의 추격을 피하다 부하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면서 난이 평정됐다. 반란군을 토벌하고 여기에 가담했던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홍가신(洪可臣)은 청난공신 1등급에, 박명현(朴名賢, ?~1608 )과 충청수사 최호(崔湖, 1536~1597)는 2등급에, 임득의(林得義, 1559~1612), 신경행(辛景行, 1547~?)은 3등급에 봉해졌다. 이들을 ‘청난5공신(淸難5功臣)’으로 부른다.

홍성의 진산 백월산에는 ‘청난5공신(淸難5功臣)’을 기리기 위해 인조 19년(1641)에 세워진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와 다섯 공신의 제향을 위해 위패를 모신 ‘홍주청난사(洪州淸難祠)’가 있다. 1989년 홍성군민들은 홍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운 5공신의 목상과 위패를 만들어 사당에 봉안하고 제향을 올려오고 있있다. 백월산 정상에는 ‘홍주청난사중수비(洪州淸難祠重修碑)’와 ‘홍가신사당’이 있는데, 공식명칭은 ‘홍후만전묘(洪候晩全廟)’다. 사당 내부에는 백월산신과 청난5공신 다섯 명의 위패, 홍가신의 가족으로 알려진 다섯 명의 목각상이 있다.

하지만 이곳에 ‘홍주청난사중수비(洪州淸難祠重修碑)’가 왜 세워져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홍주청난사중수비(洪州淸難祠重修碑)’ 기록대로라면 1618년(광해군 10) 이전에 ‘홍주청난사(洪州淸難祠)’ 또는 ‘홍후만전묘(洪候晩全廟)’가 세워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자세한 사연은 알 수가 없다. 1886년(고종 27)과 1929년에 중수했으며, 1974년 개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가신사당은 2004년 12월 화재로 전소돼 2006년 홍성군에서 다시 건축했다. 

아무튼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는 신사(1641년, 인조 19) 십이월에 세웠는데, 비문은 시강관 춘추관 현수광 조경(趙絅)이 짓고, 통훈대부 원임 형조정랑 유시영(柳時英)이 썼으며, 홍성의 안동김씨 입향조인 가선대부 원임 사헌부 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전서로 썼다. 비는 거북 받침을 놓고 그 위에 비신(높이 145㎝, 폭 70㎝, 두께 21.5㎝)을 세웠다. 1641년(인조 19) 십이월에 세워진 이래 오랫동안 돌보지 못해 파손된 것을 1973년 홍성군수가 보수해 홍성읍 대교리 55-6 국도 21호선 옆에 세워져 있다가 장항선철로 선형직선화 공사와 도로 확장 등으로 2007년 12월 28일 홍성읍 월산리 산1번지(산혜암 입구) 백월산 계곡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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