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오관리에서 첫 발굴, 우리나라 유일의 ‘목빙고(木氷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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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오관리에서 첫 발굴, 우리나라 유일의 ‘목빙고(木氷庫)’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5.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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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42〉

지난 2005년 4월 19일, 17세기에 얼음을 저장했던 ‘목빙고(木氷庫; 나무로 만든 얼음 저장고)’로 추정되는 유적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홍성 오관리 814-4번지 일원의 아파트공사 현장에서 발굴됐다. 현재의 세광엔리치타워아파트 102동 신축부지에서 발굴된 목빙고는 가로 5.5m, 세로 23.86m, 깊이 1.5m 규모로 현존하는 18세기 경 개축된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석빙고(石氷庫;보물 제66호)’ 보다도 100년(1세기) 정도 앞서는 곳으로 추정되며 전국에서 처음으로 발굴돼 문화재계에서 전국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홍성 오관리 ‘목빙고(木氷庫)’는 풍화암반층을 직사각형으로 파고들어 남아 있는 바닥 면의 길이가 23m86㎝, 너비 5m50㎝, 깊이 1m50㎝ 규모다. 목재는 이미 썩어 없어지고 일정하게 배치된 기둥구멍만 남아 있는 목빙고는 돌로 만든 석빙고처럼 내부로 들어가도록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또 바닥에서는 총길이 8m70㎝의 배수시설이 드러났으며, 얼음의 저장효율을 높이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짚과 갈대, 왕겨 등이 포함된 유기물층도 확인됐다. 목빙고는 △천장에 사용된 돌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 △벽이 돌로 만든 천장의 무게를 견딜 만큼 견고하지 못하다는 점 △벽 중하단부에 6개의 기둥구멍이 3m 간격으로 뚫려있어 천장 관련 시설이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뤄 천장을 돌이 아닌 목재로 축조했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당시 이호형 발굴조사부장은 “경주 등에서 발견된 석빙고의 비문을 보면 ‘석빙고로 개축했다’는 구절이 있다”며 “목빙고가 석빙고 이전 단계로 추정되는 점과 유적의 여러 가지 특징에 따라 오관리 유적은 17세기 경 축조된 목빙고(木氷庫)가 맞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은 동학군과 관련된 1894년 일본공사관 기록에서 현재 위치에 ‘빙고치(氷庫峠)’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 인해 목빙고 옆에는 ‘홍주동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홍성 오관리 ‘목빙고(木氷庫)’는 얼음 녹은 물이 밖으로 흘러나가도록 입구에서 내부로 들어갈수록 경사져 있고, 흙을 구워 기와처럼 만든 관을 바닥에 묻어 배수시설을 갖췄다. 이와 함께 유적지 바닥에서 유기물 포함층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얼음을 저장할 때 효율을 높이려고 빙고 바닥에 짚이나 갈대, 왕겨 등을 깔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목빙고 유적은 발굴 당시 아파트신축부지에 위치해 있어 건설업체와 입주민들의 반발로 갈등이 일었고, 문화재위원회는 현장 조사를 벌인 후 아파트신축부지 옆 유휴부지(오관리 806-1번지)에 이전 복원키로 최종결정함으로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유적을 현장 보존할 경우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위치함으로써 관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단위개발사업에도 차질이 우려된다며, 이 같은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조선 시대 빙고는 18세기 개축된 석빙고(石氷庫)로 경상북도 4곳과 경상남도 2곳 등 6곳에서만 발굴돼 확인됐다. 하지만 전국적으로나 특히 충청도에서 ‘목빙고(木氷庫)’가 발견되기는 홍성 오관리 유적이 처음이다. 그동안 발굴된 백제 시대 빙고로는 한성 도읍기의 연기 나성리 유적, 웅진기의 공주 정지산 유적 빙고가 있으며, 지난 2015년 1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도시 부여에서 백제 사비 시기(538~660년) 빙고(氷庫) 유적이 최초로 발견되기도 했다. 부여의 구드래 일원에서는 백제 시대 ‘빙고(氷庫)’와 함께 조선 시대 ‘목빙고(木氷庫)’도 확인했다.

이 ‘목빙고(木氷庫)’는 앞서 2005년에 발견된 홍성 오관리 유적인 ‘목빙고(木氷庫)’에서 확인된 빙고와 형태와 규모 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며, 조선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고도문화재단은 “18세기 이후 석빙고 형태로 변화한 빙고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자료”라고 밝혔다. 조사 지역 일대는 빙고재와 장승배기(장승이 있던 곳), 구드래(큰 나라)등의 고유지명이 남아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특수지형도와 1998년도 제작 지도에서도 빙고리(氷庫里), 빙고재로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 후기에 편찬된 ‘충청남도읍지’(忠淸南道邑誌)에 “현내면 빙고리는 관아에서 서쪽으로 1리(약 400m) 떨어져 있다”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빙고가 존재할 가능성이 큰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성 오관리 ‘목빙고(木氷庫)’는 조선 시대 얼음 수급체계와 빙고의 위치, 빙고의 구조 등을 밝혀내는 중요한 단서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고 발굴조사팀이 평가한 만큼 소중한 홍성의 문화재로 보존·홍보하고 선조의 지혜를 볼 수 있는 문화재교육을 비롯한 교육의 현장으로도 기능하며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관리 목빙고를 두고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며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도 홍성군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홍성군은 홍주성 복원사업과 연계해 홍주의 천년 역사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목빙고 유적을 문화재 등으로 지정·보호할 수 있는 현명하고 지속적인 방안과 정책 등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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