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해안지방 농민군의 구심점 ‘춘암상사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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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해안지방 농민군의 구심점 ‘춘암상사 박인호’
  • 취재·사진=한관우·한기원·김경미·최진솔 기자, 협조=홍주일보·홍주신문 마을기자단
  • 승인 2023.07.0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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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5〉
예산 삽교읍 하포1리 생가지 주변에 세워져 있는 춘암상사 박인호 유허비.
  • 춘암상사 ‘박인호’ 유허비

“전염병에 걸린 세상을 존중받는 세상으로 구원할 명약이 있으리이까? 세류에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소신으로 ‘참’과 ‘도리’를 다하여 세상을 바꾸고 싶나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외국의 침략이 없어서 이른바 태평의 세월을 누렸다. 이렇게 되자 농업생산력은 높아졌고 상업활동도 확대됐다. 이러한 가운데 정치적 비리와 토지의 독점현상이 두드러졌다. 여기에 따라 ‘삼정(三政)’ 등 국가적 수탈과 도조 등 대토지 소유자의 독자적 수탈이 가중됐다.

조선 말 ‘세도정치(勢道政治)’는 파국으로 이를 만큼 심해졌다. 그나마 견제기능이 작동하던 ‘붕당체제’는 무너졌고, 권문세가 몇 집안이 국정을 장악했으며, 그들의 전횡은 끝이 없었다. 사회는 혼란스러워졌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 졌다. 이는 거듭된 ‘농민봉기(農民蜂起)’의 원인이 됐다. 백성에게 직결된 국정 실패의 대표적인 것이 ‘삼정(三政)의 문란’이다. 

‘삼정(三政)’이란 조선조 재정(財政)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을 의미한다. ‘전세(田稅)’는 생산수단이자 자산인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요즘으로 보면 법인세, 소득세, 부동산세를 합한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관리들은 각종 세금을 쉽게 걷기 위해 토지에 전세 외에도 다양한 잡세를 부과했다. 여기에 향리와 수령들의 부정부패까지 겹쳐 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가중됐다. 게다가 지주들은 부담을 소작인들에게 떠넘겨 회피하니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가 심화됐다.

‘군포(軍布)’는 군역의 대가로 내는 포목(옷감)이다. 조선 시대 후기 지배층은 갖은 수를 써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군포를 백성들에게 떠넘겼다. 군포 부담을 못 이겨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났고 남아 있는 친척이나 이웃들이 대신 군포를 바쳐야 했다. 또 노인과 아이들은 군대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포를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역(軍役)’은 납세와 함께 국민의 대표적인 의무다. 우리 헌법도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의무를 합한 것이 ‘군포(軍布)’다. 사회구성원이 이를 공평하게 부담해야 사회는 안정되고 국방은 튼튼해진다. 일반 국민이 특권층의 군역 회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환곡(還穀)’은 곡식을 대여하는 제도다. 일종의 금융 제도다. 본래 백성의 구휼을 위한 제도였는데, 조선 말기로 가면 고리대처럼 이용됐다. 관리기강이 무너지고 수탈 강도는 극심해 졌다. 빌리지도 않았는데 갚아야 하는 경우가 예사였으며, 모래가 반이나 섞인 곡식을 강제로 빌려주기도 했다. 조선조가 망한 것은 ‘삼정(三政)의 문란’과 함께 ‘과거제도(科擧制度)’의 붕괴가 큰 원인이었다. 절망한 선비들은 피폐해진 민중과 함께 봉기하게 됐던 원인이다. 조선의 부패와 모순에 출사의 길이 좌절된 농촌의 지식인에게 ‘동학사상(東學思想)’은 충격 그 자체였다.

충청도 덕산의 박인호(朴寅浩)는 ‘동학’과 ‘참’의 정신을 지키려고 애쓴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였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적 차별과 경제적 착취와 외세의 지배가 없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했고, 대한제국기에는 문명개화를 위해 갑진개화운동을 이끌었으며, 배후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기도 했다.
 

박인호 생가터에는 생가는 헐려 없어진 채 지금은 창고로 변했다.

■ 박인호, 동학정신·참된 도리의 가치 실현
박인호(朴寅浩)는 1855년 2월 1일(음력 1854년 12월 25일)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막골)에서 밀양 박(朴)씨 명구(明九)와 온양 방(方)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명은 용호(龍浩), 이명은 남수(南壽), 자는 도일(道一)이며, 천도교의 도호(道號)는 춘암(春菴), 존호(尊號)는 상사(上師)이다. 신분은 상민(常民)이었다. 그런데 모계로 미뤄 보면, 신분이 더 낮았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천민이건, 평민이건, 그가 양반과 중인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층이었다는 사실은 크게 다를 바 없다. 경제적으로도 집안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고 하는데,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는 주장 등으로 미뤄 보면 곤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인호는 성격이 온순했으나 힘이 장사여서 덕산(德山) 읍내에서 씨름 장사로 이름을 날렸다. 힘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술도 잘 마시고 걸음도 빨라서 ‘용호도사(龍虎道師)’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박인호는 열한 살 경 한문 교육을 받고 후일 작성한 시서(詩書)를 통해 보건대, 소학과 통감절요, 논어·맹자·중용·대학의 사서를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명경과와 진사과의 시험과목인 경전(經典)과 시(詩)·부(賦)·표(表)·전(箋)·책문(策問) 등의 공부에 매진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는 열다섯 살에 지가서(地家書)와 의서(醫書) 등을 공부했다고 한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 잡과를 통해 풍수나 의관이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꿈마저도 실현되지 못했다. 이는 과거제의 폐지가 거론될 정도로 만연한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참’과 ‘도리’를 중요하게 여긴 그가 세류에 영합해 소신을 굽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사의 길이 좌절된 농촌의 지식인에게, 조선의 부패와 모순은 점점 더 또렷이 부각 됐다. 박인호가 출생한 예산의 하포리 지역은 내포지역 최대의 곡창지대여서, 이 지역의 농민들은 지주로부터 심한 착취를 받고 있었다. 또한 관리의 가렴주구와 양반 지배층의 신분적 차별도 심했다. 이러한 현실을 목도한 박인호에게 조선은 문제투성이로 비쳤고, 개혁의 대상으로 인식됐다. 

충남 예산에는 이미 1880년대 초에 동학이 전파됐다. 1880년대 초 예산 읍내와 삽교읍 내포 지역에는 동학 신자가 있었다. 박인호는 1883년 김월화가 경영하는 예산 읍내의 오리정 주막에서 김월화 부부로부터 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동학을 믿으면 차별과 착취와 질병이 만연한 당시의 사회를 평등한 이상적 사회로 개벽할 수 있다는 주장을 듣자, 그에게 동학은 전염병에 걸린 세상을 구원하는 명약처럼 인식됐다.

동학을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83년 3월 18일, 박인호는 목천에 머물던 최시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고 바른 마음으로 한울님을 믿어야 세상이 포덕천하가 된다.”는 말을 믿고 동학에 입교했다. 박인호는 ‘동학을 믿으면 사람이 차별 없이 존중받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동학에 입교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됐을 때, 박인호는 제2차 봉기 때 기포(起包, 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하던 일)했다. 1894년 10월 1일 기포한 박인호는 예포대접주 박덕칠 등과 해미, 덕산, 예산, 온양, 당진, 홍주 등지에서 관군과 일본군, 민보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10월 27일 당진군 면천면 ‘승전곡’에서는 일본군 400명과 관군 500명, 민보군 수 천 명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1894년 10월 말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후, 박인호는 도피해 숨어 지내야만 했다. 삽다리 부근의 언덕에 누워있다가 깨어난 그는 오리정 주막의 교인 김월화의 도움으로 위급을 피했다. 그리고 김월화의 도움으로 주변 금오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다가 칠갑산 느티정에 오두막집을 짓고 은거했다. 삼 년 뒤인 1897년 박인호는 김명배, 김의형, 김주동과 함께 최시형을 찾아감으로써 동학 교단과 다시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됐다. 1898년 박인호는 최시형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보다 여섯 살이나 연하인 손병희를 스승으로 삼는 예를 행했다. 1898년 4월 최시형이 체포되자 박인호는 홍주군 김주열의 논 10두락(斗落; 논밭 넓이의 단위. ‘마지기’의 이두식 한자어, 한 말의 씨앗을 뿌릴 만한 넓이, 대개 논은 150~300평, 밭은 100평 정도에 해당)을 팔아 최시형의 구명 활동을 벌였다. 또 그해 6월 최시형이 교형을 당하자, 그 유해를 수습해 안장하기도 했다.

박인호는 ‘동학’과 ‘참’의 정신을 지키려고 애쓴 사회운동가,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였다. 조선 시대에 신분적 차별과 경제적 착취와 외세의 지배가 없는 사회를 이상적인 것으로 믿고 이의 구현을 위해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했다. 또 대한제국기에는 문명개화의 달성이 우리의 민족과 국가를 위한 길이라 믿고, 손병희의 지휘를 받아 이른바 갑진개화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적 차별과 억압이 없는 독립된 국가를 이루기 위해, 3·1독립운동과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박인호는 동학의 정신과 참된 도리를 깨닫기 위해 수련했고, 믿음과 가치를 확산하고 실현하기 위해 투쟁했다.
 

춘암상사 박인호 유허비 중수 봉고식 광경.

■ 예산,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 중심지
예산은 동학농민혁명군 6만여 북접군의 활동 중심지였다. 당시 농민군을 지휘했던 덕의대접주 춘암 박인호(1855~1940)는 내포 지역에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기치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교화, 동학 교단을 조직했다. 1880년대 예산에 처음으로 전파된 동학은 관의 감시와 탄압, 유림세력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지도부의 꾸준한 포덕 활동으로 많은 교인을 양성했다.

지금도 예산지역 곳곳에는 한순간이라도 반짝였던 농민군의 승리의 역사와 이를 이어가고자 했던 농민군 지도자들의 고뇌에 찬 숨결이 자리하고 있다. 갑오년 9월 30일 기포한 내포 농민군들은 10월 1일 태안과 서산 관아를 공격, 수감돼 있던 농민군을 석방시켰다. 이후 당시 농민군을 이끈 박인호와 박덕칠은 현재의 삽교읍과 덕산에 전진기지 성격의 ‘대도소’를 설치했다. 

특히 삽교읍에 설치된 ‘예포대도소’는 농민군지도부가 전투준비를 위한 군수 물품을 비축하거나 인근 지역과의 연락을 맡았다. 하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관군의 공세도 매서웠다. 갑오년 10월 11일 호연초토사 이승우는 내포동학농민군 본부인 예포대도소를 불시에 공격했고, 이에 농민군은 패퇴했다. 관군은 대도소를 불태우는 동시에 혁명군에 협조한 농민들의 세간살이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예산군 대흥면에 위치한 ‘대흥관아’는 갑오년 10월 7일 예포대접주 박덕칠이 이끈 농민군이 일시 점령한 곳이다. 당시 박덕칠은 목천 유진수, 홍주 박성순, 대흥 차경천 등을 앞세워 군량창고와 무기고를 부쉈다. 군수 이창세는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부랴부랴 현장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읍 관작리에 위치한 기념공원은 2010년 관작리 전적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조성됐다. 관군·일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던 농민군은 갑오년 10월 24일 승전곡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같은 달 26일 농민군은 홍주목 중군 김병돈과 군관 이석범이 이끄는 관군의 습격을 받는다. 이에 농민군은 전열을 다시 정비, 다음날 3만여 명의 병력을 모아 이날 관군과 일대 격전을 펼친다. 4000~5000명에 달하는 토벌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를 쏘며 접근했다.

농민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토벌군 진영의 야산을 포위, 육탄전을 벌여 끝내 토벌군을 패퇴시켰다. 이 전투는 농민군의 최대승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예산군에는 내포 3만여 농민군이 승전했던 관작리 전적지, 관군의 무차별살육을 피해 은둔해 숨어지내면서 형성된 주교리 ‘은골’과 집단 정착 마을인 탄중리, 농민군 지휘본부였던 삽교 성리의 ‘예포대도소’ 등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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